[조우석칼럼] 프란체스카 여사의 속옷 주머니와 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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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쳐 몰랐던 초대 영부인의 진면목
“귀한 돈 1달러도 남의 나라에 쓸 수 없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던 풍모에 가슴 뭉클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05 06:31:00

요즘 절감하지만 우린 우남 이승만 박사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1900~1992) 여사를 너무도 모르는 채 살아왔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던 그의 진면목에 대해 관심 자체가 없었다. 현대사의 거인 우남의 실체를 모르니까 덩달아 영부인에도 무심했던 것일까? 다큐 영화 ‘건국전쟁’의 흥행 이후 관련 책을 들여다보는 나는 요즘 그런 뒤늦은 후회를 한다.

고백하지만 그건 책 한 권이 일으킨 파문이기도 하다. 헌책방에서 구한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도서출판 촛불, 2006)을 읽으며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런 분이었구나 하는 걸 새삼 깨치고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래 책장에 꽂아 뒀던 ‘6·25와 이승만·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를 꺼내 두 책을 번갈아 읽으니 보완이 되면서 그렇게 좋을 수 없다.

‘6·25와 이승만’ 앞부분에서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출신의 남정옥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 박사가 결혼 후 독립운동과 건국,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그녀의 내조는 절대적이었다.” 그게 정확한 말이다. 단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에 보이는 우남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또 달랐다. 다음 인용문은 그 책 부록 편에 실려 있는 기자 출신 송정숙 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적이다.

“물정 모르는 서양 색시가 어쩌다가 만난 식민지 나라의 독립운동가를 꼬셔서 퍼스트레이디 자리 꿰차고 공주처럼 살다가 파국을 맞게 한 주인공.” 그동안 우리가 품어 온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통념을 송 전 장관은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오해 마시라. 그가 벌써 25년 전에 썼던 그 글은 한국인의 선입견을 허무는 작업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스토리는 이렇다. 송 전 장관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전 입었던 속옷을 이화장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봤단다. 무명 속옷, 그것도 깁고 또 기워서 거의 누더기였다. “그걸 걸쳤던 분에 대한 연민과 서러움의 감정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고 그는 속내를 텋어놓았다. 실제로 글 제목도 ‘누더기’다. 누더기이지만 헝겊의 결을 살려 곱게 감침질한 바느질 솜씨랑은 참으로 얌전했다.

그의 표현대로 “옛날 청빈한 사대부 댁 내당 아낙의 솜씨가 이랬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쇼크는 따로 있었다. 속옷 앞판에 덧댄 모습의 꽤 큰 주머니였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고쟁이에 달아 둔 돈주머니 같은 것이다. 그걸 보고 프란체스카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가 “그게 바로 우리 어머님의 스위스 비밀 금고”라고 싱긋 웃으며 설명해 줬다.

이런 얘기다. 1965년 우남이 돌아가신 뒤 프란체스가 여사는 꽉 찬 5년을 당신의 고국 오스트리아에 가서 살았다. 귀국은 1970년, 박정희정부가 연금 문제 등을 신경 써 줘서 가능했다.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는 꼬깃꼬깃한 달러 지폐를 그 속옷 주머니에서 꺼냈다. 3000달러였다. 그러고는 “이걸로 내 틀니를 하자”고 제안했다. 며느리가 여쭤봤다. “거기 유럽에서 하실 일이지 왜요?”

프란체스카 여사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이자 내 남편인 이승만 박사는 외화라면 1달러도 아깝다고 벌벌 떨었다. 그런데 왜 그 거금을 ‘남의 나라’에서 쓰겠느냐?” 실제로 틀니 작업은 당시 메디칼센터의 최상렬 박사가 했다. 이후 얘기도 흥미롭다. 틀니가 썩 만족스러웠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화장에서 외국 귀빈을 맞을 때마다 “한국에서 틀니를 하고 가세요”라고 권유했다.

“꼭 이 틀니를 끼고 대통령을 만나야겠다”고 하도 당부를 하셔서 여사의 임종 직전 어렵게 유족들이 그 틀니를 끼워 드리는 작업도 했다. 꼭 일주일 전 책의 그 대목을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 참을 수가 없었다. 막바로 송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10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휴대폰에 절로 손이 간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세요?”라고 반갑게 맞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분도 엄청 좋아하셨다.

“맞아 맞아. 우리가 그동안 첫 영부인을 모른 척하고 살아온 거예요.” 실제로 송 전 장관은 그 글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 망각은) 부끄러운 무지이고 몰염치일 뿐이다. 그럴 때면 우리 근대사 연구의 한 대가가 그(이승만 대통령)를 두고 한 말이 생각나곤 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그 눈높이만큼 높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새처럼 멀리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최초 지도자였다.”

사실 영화 ‘건국전쟁’ 뒷부분에도 그런 대목이 나오지 않던가. “우리는 한 10년·20년이 지나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그때 그런 일을 한 이유가 그것이구나를 아는 겁니다.” 맞다. 우린 지금 우남과 프란체스카에 대한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이다. 내년에 개봉될 ‘건국전쟁’ 2편 ‘인간 이승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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