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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무거운 마음으로 진영으로 돌아오자 장손무기가 급히 달려 나왔다.
“고구려의 지원군이 나타났습니다. 그 규모가 자못 대단하다 합니다.”
태종은 애써 침착한 태도로 수하들을 거느리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고구려군의 위용은 실로 장대했다. 5만 정도의 기병이 선두에 섰고, 약 1만의 말갈군이 뒤를 이었다. 계속해서 10만쯤 되는 보병이 전투용 수레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었다. 그 행렬이 무려 40여 리에 걸쳐 이어졌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고구려군의 최정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태종은 고구려군의 기세에 눌려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서둘러 영채로 돌아왔다.
당 태종은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척후병의 보고를 받았다.
“대로 고정의가 이끄는 정예군으로, 말갈군을 포함해서 15만 명의 병력이라 합니다.”
태종이 옆에 있던 장손무기에게 물었다.
“고정의는 어떤 자요?”
“그는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백전노장입니다. 사려가 깊고 용병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휘하 군사들이 대부분 여러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이기 때문에 장악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욕살인 고연수와 고혜진은 주장(主將)을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큽니다.”
“아무리 세력이 큰 장수라 해도 임금이 임명한 주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지 않소.”
“욕살의 관등이 그리 높지는 않으나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아무리 중앙에서 파견된 수장(首將)이라 해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고연수나 고혜진처럼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당 태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두 욕살의 성향은 어떠하오?”
“첩보에 따르면 고연수는 용력(勇力)은 대단하지만 성격이 급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라 합니다. 고혜진은 영리하기는 하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 합니다.”
“그렇다면 계책을 써서 그들을 유인하는 게 좋겠구려.”
“그렇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태종은 배 속으로부터 웃음이 솟구쳤다.
“이대로 대치 상태가 오래가면 우리에게 불리하오. 저들이 지연작전을 펼치지 못하게 유인하여 일거에 격파해야 하겠구려.”
장손무기도 맞장구를 쳤다.
“첫 전투에서는 일부러 져 주어 저들을 기고만장하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둘의 마음이 통했기에 회의는 바로 끝났다.
“일단 적정을 살핀 후에 세부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당 태종은 수하들과 함께 고구려군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고구려 지원군의 수장인 고정의는 선봉을 맡은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을 불러 주의를 줬다.
“당주 이세민은 수주 양광과는 달리 간계가 뛰어나다. 그러므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적을 교란하면서 보급로를 끊고, 적당히 싸우는 척하면서 시일을 끌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저들은 식량이 떨어져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 친다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
고연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고구려 최고의 군사들이 있습니다. 농민병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인 당군이 제아무리 숫자가 많다 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정면 승부를 허락해 주십시오.”
고혜진도 거들었다.
“고연수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대막리지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 승리를 바라시는 겁니다. 도적들을 보고 피하기만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무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고정의가 두 사람에게 일침을 놓았다.
“혈기만 내세운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절대 당군과 맞붙어서는 안 된다. 이는 명령이니 반드시 명심하라!”
고정의의 막사를 나온 고연수는 고혜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로께서도 이제 늙으셨구려. 그깟 당나라 오합지졸을 무서워해서야 어찌 싸움에서 이기길 바라겠소.”
고혜진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장군의 말씀이 옳소. 하지만 이번 원정의 주장은 고정의 장군이요. 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소.”
고연수는 고혜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당 태종은 고구려군의 형세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러다 보니 좋은 계책이 떠올랐다. 그는 당장 좌위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를 불렀다. 그는 돌궐족 출신으로 당 태종에게 항복하여 당나라 장수가 됐으며 태종의 부마이기도 했다.
태종은 아사나사이에게 명을 내렸다.
“휘하의 기병 1천을 이끌고 고연수의 부대를 공격하라. 싸우다가 패한 척하면서 안시성 동남쪽으로 저들을 유인해야 한다. 그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아사나사이는 즉시 1천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을 들이쳤다.
당군이 쳐들어오자 고연수는 궁수들에게 명해 활을 쏘아 진격을 막게 했다. 무턱대고 달려들던 당군은 화살에 맞아 모조리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이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달아나자 고연수는 군사들을 보내 추격하게 했다.
고구려의 추격병이 한참 당군을 쫓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고연수는 안시성에서 동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산기슭에 진을 쳤다. 날이 밝으면 안시성의 군사들과 협공을 펼칠 계획이었다.
고혜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당군의 반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고연수가 크게 웃었다.
“오늘 당군은 참패를 당했소. 아군의 용맹에 겁을 먹어서 감히 먼저 공격하지는 못할 거요. 설령 쳐들어온다 해도 고정의 장군이 이끄는 대군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술 한 잔 마시고 푹 주무시오. 내일 아침 일찍 안시성으로 가서 양만춘과 합류합시다.”
고혜진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났다.
고구려의 선봉대가 승리에 들떠 있을 때 당 태종의 막사에서는 숨 가쁘게 작전 지시가 내려지고 있었다.
태종은 이세적에게 명령했다.
“보기병 1만5000을 이끌고 고구려 선봉대 주변 서쪽 고개에 진을 치고 있다가 신호와 동시에 내달아 적군을 척살하라.”
이어서 우진달(牛進達)에게 지시했다.
“궁수병 1만을 줄 테니 고구려 진영 뒤쪽에 있는 협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나와서 공격하라.”
당 태종은 좌무위 대장군 왕군악(王君愕)을 따로 불러 인근 강의 다리를 끊어 고구려군의 퇴로를 막게 했다.
지시를 끝낸 당 태종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 북쪽에 자리한 산으로 올라갔다.
당 태종의 군대가 출진하자 장손무기는 남은 장수들을 모아 놓고 명을 내렸다.
“양홍례(楊弘禮) 장군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동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고구려의 본대가 나타나면 맞아 싸우시오. 유홍기(劉弘基) 장군은 나와 함께 기병 1만과 보병 10만을 거느리고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가 상황을 봐서 대응토록 합시다. 고정의 부대는 절대 만만치 않소. 내일의 전투가 전쟁의 분수령이 될 것이오.”
명을 받은 당나라 장수들은 각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선봉대가 안시성 동남쪽 산기슭에 영채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고정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급히 수하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두 욕살이 영채를 세운 곳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지(死地)나 다름없다. 그대로 두면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날이 밝는 대로 그들을 구하러 갈 것이니 장군들은 출진을 준비하라.”
그리고 장수 각각에 작전을 지시했다.
“선봉대의 진영 아래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저들도 우리가 구원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길목에 군사를 배치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기병을 내세워 당군의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온영진 장군은 철기병 1만과 경기병 3만을 이끌고 선봉으로 나아가 당군을 격파하고, 후속 부대가 적진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라. 그 후에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지 말고 퇴로를 확보하라. 누성달 장군은 말갈 기병 1만을 이끌고 전위를 따라가다가 길이 열리면 고연수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산기슭으로 나아가 그들을 구원하라. 계구(季仇) 장군은 병차 5백 승을 거느리고 벌판의 남쪽에 포진해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당나라 진영을 향해 쇠뇌 공격을 퍼부어라. 강삼석(姜三錫) 장군은 보병과 궁노수 3만을 거느리고 후위에 있다가 상황을 봐서 협공하라. 나는 벌판 언덕에서 지휘하면서 형편에 따라 행동을 취할 것이다.”
병차는 본래 말을 잘 타지 못하는 군사를 위해 만든 것으로 전차라고도 불린다. 평지에서 대회전을 주로 펼치는 서방에서는 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산지가 많은 고구려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비밀리에 병차를 제작해 두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병차는 기존의 수레를 변형한 것으로 한 대에 세 사람이 탔다. 한 사람은 말을 몰고 두 사람은 활과 쇠뇌를 쏘게 되어 있었다. 사람 셋과 활·창·칼 등의 병장기를 싣는 만큼 중량이 무거워 말 두 필이 끌어야 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병보다 뛰어난 공격력을 갖췄지만 육중한 수레의 특성상 기동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수장의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각자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가 부하들을 불러 놓고 지시했다.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아침밥을 해 먹은 후에 온영진 장군을 필두로 해서 기세 좋게 출진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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