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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수는 고혜진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낸 그는 바람을 쐬기 위해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주위를 휘돌아보는데 서쪽 산등성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가 어른거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당나라 군사들이 산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고연수는 적의 기습을 감지하고 황급히 막사로 돌아와서 수하 장수들을 불렀다.
“지금 서쪽 산등성이 쪽에서 당군이 움직이고 있소. 과히 많은 수는 아닌 듯하니 우리가 선수를 쳐서 치도록 합시다.”
고연수의 지시에 따라 고혜진이 휘하 군사를 이끌고 서쪽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에서 당군이 튀어나와 공격해 왔다. 이를 본 고연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맞붙어 싸우고 있자니 이번에는 북쪽 산속에서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이 북을 치며 내달려왔다.
어느새 사방에서 수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깃발이 휘날렸다. 고구려 군사들은 무수한 당군의 깃발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여기저기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당군의 함성까지 어우러지니 천지가 진동했다. 마치 수십만 군사에 포위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군은 당군과 맞서 싸울 생각을 버리고 산 아래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쪽에도 이미 많은 당군이 버티고 있었다. 고연수의 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강가에 다다랐다. 하지만 어느새 당나라 군사가 다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당 태종의 명을 받고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던 왕군악의 군대였다.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진 고구려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당군에게 덤벼들었다. 고구려군이 야차처럼 달려드니 험악한 기세에 눌린 당나라 군사들이 물러서기 시작했다.
고연수는 살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판단이었다. 갑자기 장손무기가 이끄는 기병이 나타나더니 왕군악의 부대와 합세하여 고구려군의 퇴로를 막았다.
고연수는 지원군까지 합세하여 더욱 막강해진 당군과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산 위에서부터 추격해 온 당군들이 이미 지척에 육박해 있었다. 앞뒤로 막힌 상태에서 고연수가 택할 길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뿐이었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당군과 싸웠다. 치열한 접전 끝에 간신히 빠져나온 고연수의 부대는 산기슭으로 피했다. 산을 등지고 진을 친 후에 주위를 살펴보니 당군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한편, 온영진은 4만의 기병을 이끌고 호호탕탕 벌판으로 나아갔다. 고정의의 예측대로 길목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당군이 깔려 있었다. 멀리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니 당장 양홍례의 군사들이었다.
온영진은 군사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기병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군은 숫자만 많을 뿐 고구려군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사였다. 그에 비해 고구려군은 고도로 훈련된 일기당백의 전사였다. 전투가 개시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온영진의 부대는 1만 이상의 당군을 척살했다.
휘하의 군사들이 계속 쓰러져 갔지만 양홍례는 퇴각을 명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온영진의 군대가 산기슭으로 나아가 고연수의 부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산으로 간 당 태종의 안위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당군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이때, 누성달이 이끄는 1만의 말갈 기병이 격전을 치르고 있는 전장을 우회하여 고연수가 진을 치고 있는 산기슭으로 달려갔다. 서남쪽 언덕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손무기는 왕군에게 명해 그들을 막게 했다.
말갈 기병대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있던 당군이 더 빨랐다. 그들이 강을 건너서 다리 앞에 포진한 후에야 누성달이 이끄는 기병이 강가에 도착했다.
누성달은 찬찬히 당의 진영을 살폈다. 수적 우세만 믿고 어리석게도 강을 등진 채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당군과 거리를 둔 채 화살을 날리라 일렀다. 적군은 강물을 등지고 있어 물러날 데가 없었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화살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려고 갈팡질팡하자 대오가 일시에 무너졌다. 누성달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기마군을 이끌고 적진을 세차게 몰아쳤다. 말갈 기병의 기세에 놀란 당군들은 다리 쪽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수많은 군사가 한꺼번에 건너려고 하다 보니 다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당군은 중심을 잃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군사들은 말갈 기병의 창칼에 찔리고 베였다.
한식경이 지나자 강가는 온통 당군의 시체로 뒤덮였다. 이때 왕군악은 헤엄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장손무기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 강가에 진을 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구려군이 강을 못 건너게 해야 했다.
다리가 끊긴 데다가 장손무기의 군대까지 몰려오자 누성달은 강 건너는 것을 포기했다.
장손무기는 당 태종에게 전령을 보내 왕군악의 참패를 보고했다.
이를 듣고 격분한 당 태종은 주위에 모인 장수들에게 부르짖었다.
“내 말갈 놈들을 잡으면 산 채로 땅에 묻으리라.”
당나라 장수들은 태종이 내뿜는 독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멀리서 전투 광경을 지켜보던 고정의는 북을 울려 온영진의 군대를 뒤로 물려 쉬게 한 후, 동남쪽에 포진해 있던 계구의 병차 부대를 출동시켰다. 두 마리 준마가 끄는 병차들이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당군을 향해 달려갔다. 병차에 탄 궁노수들은 고구려 기병과 싸우느라 지친 당군을 향해 쇠뇌와 각궁을 쏘아댔다.
벌 떼처럼 달려드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당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병차를 피하다 보니 대오가 크게 흐트러지면서 궁수들의 공격에 노출됐다. 당군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병차 바퀴에 치여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고정의는 광활한 벌판에서 벌어지는 전투 광경을 보며 다음 작전을 구상했다.
이때 옆에 있던 부장 방강(方康)이 아뢰었다.
“강을 건너서 당군을 격파하면 고연수 장군을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정의는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리 지체하다가는 선봉대가 다 죽을 겁니다.”
방강이 애가 타서 재촉하자 고정의는 그제야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들 그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겠나. 하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무리해서 강을 건너가 봤자 그들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전군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전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방강이 침통한 어조로 되물었다.
“진정 포기하시는 겁니까?”
“이 모두가 고연수가 나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설사 많은 희생을 치르고 그들을 구출한다고 해도 고연수와 고혜진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은 군법을 어기고 아군에 큰 손해를 끼쳤기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그리되면 그들을 지지하는 남부와 북부 귀족들의 원망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용서하면 군의 기강이 무너지리라. 어느 쪽도 조정에 도움이 안 된다면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게 가장 좋은 결말이다.”
방강은 고정의의 내심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고연수는 언덕 위에서 혼전(混戰)이 벌어지고 있는 강 건너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당군을 몰아붙이자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고정의 장군이 오셨으니 살 수 있겠구나.’
해가 기울 무렵이 되자 고연수의 낙관은 낙담으로 바뀌었다. 벌판에서 혼전을 벌이던 고구려 군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강 건너기를 포기한 것이었다. 당군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고연수는 즉시 고혜진을 불렀다. 그는 당군을 쫓아 산으로 올라갔다가 기습을 당해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와 있었다.
“고정의 장군이 우리를 버린 듯하오.”
고연수의 탄식에 고혜진의 가슴이 무너졌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고혜진은 기겁했다.
“내 한목숨 살자고 나라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고연수도 어쩔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고연수는 군사를 점고했다. 선봉대는 겨우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군사를 사열한 후 고연수는 일장연설을 했다.
“지금 우리는 당군에게 포위된 상태다. 우리가 살 길은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적진을 뚫고 강을 건너 본진에 합류하는 것이다. 강을 건너면 살고 건너지 못하면 죽는다. 살기 위해 싸워라. 살아서 만나자.”
선봉대는 대오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죽음을 각오한 고구려 군사들은 용맹했다. 죽기 살기로 찌르고 베면서 나아가니 당군은 겁을 먹고 비켜섰다.
마지막 남은 고구려 군사가 진영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포성이 울리더니 좌우 협곡에 매복해 있던 당 태종의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나왔다.
갑작스럽게 출현한 복병 때문에 고구려군의 대열이 두 동강 났다. 당군은 상대가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곳곳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선봉대의 고구려 군사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양군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고연수와 고혜진은 6800명의 군사와 함께 당군의 포로가 됐다. 이 속에는 말갈병 33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시성 동남쪽에 있는 야산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일명 주필산 전투로 불린다.
전황을 보고받은 태종은 장손무기를 조용히 불렀다.
“이번 전투에서 고구려의 선봉군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아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 이래서야 어찌 이긴 전투라 할 수 있겠는가. 뒷일은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
장손무기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종군사관(從軍史官)을 불러 사초에서 고정의 군대의 활약상을 빼게 했다.
당 태종은 포로로 잡힌 고연수와 고혜진을 달래 당군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공언한 대로 생포한 말갈병 3300명을 생매장했다.
[임종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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