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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하고 돌아오자 장안의 백성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번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장병의 집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건안성에서 대패한 장량과 비사성에서 도망쳐 온 장문간 등 십여 명의 장수를 벌하는 선에서 전후 처리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백성의 원성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민심이 흉흉하던 어느 날 태종은 장손무기를 대전으로 불렀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참패한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시오?”
“고구려는 쉽게 넘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험한 산에 성을 쌓고, 성들끼리 유기적인 협력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략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훈련이 잘된 해군을 보유하고 있어서 바다로의 접근도 쉽지 않습니다.”
당 태종이 하나 남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고구려 해군이 강한 이유가 뭐요?”
“그들의 선박은 군사나 양곡을 운반하는 용도로 건조된 우리 배와는 다릅니다. 대형 쇠뇌와 같은 살상용 무기를 장착하고 당파(撞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군사들은 해전에 대비한 조련을 받아 배 위에서도 자유롭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해군이 그들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소?”
“일단 고구려의 전선을 본떠 배를 개발하고 이를 대량으로 건조해야 합니다.”
듣고 보니 틀린 구석이 없었다.
태종은 한참 궁리를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동의 성들은 너무도 굳건하였소. 이를 극복할 방도가 없겠소?”
“요동을 공격할 때마다 매번 참패를 당하는 이유는 고구려의 성이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쳐들어가 봤자 승산이 없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요동 지역에 소규모 군대를 자주 보내 노략질을 자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인근의 백성이 생업을 포기하고 떠날 테니 일대의 성들도 차츰 고립되고 피폐해질 겁니다. 그때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장손무기는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을 제의했다.
당 태종은 지난날의 패배를 거울삼아 독단을 버리고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장손무기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먼저 송주 자사 왕파리(王波利)에게 명을 내려 강남 12주의 공인(工人)을 징발해 옛 촉나라 땅인 검남도(劍南島)에서 대선(大船)을 만들게 했다. 선박 건조에는 수많은 백성이 동원됐는데 그 노역이 고달파 원성이 드높았다. 하지만 당 태종은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행했다. 이에 분노한 백성이 들고일어나자 태종은 군사를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동자들의 목을 벴다. 그는 고구려에 패한 이후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서력 647년 3월, 당 태종은 절치부심 끝에 좌무위 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대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 반도 남단을 치게 했다.
또한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이랑(孫貳朗)을 부총관으로 삼아 영주의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신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세적은 요동성을 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후 본대를 거느리고 통정진을 지나 신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주 원철(元哲)은 장수들을 불러서 대책을 강구했다.
“이세적이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왔나 보오. 저것들을 어찌하면 좋겠소?”
부장 하약소(何若召)가 의견을 개진했다.
“당군은 우리에게 패한 이후로 절치부심해 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예봉을 막아 내기는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일단 수성(守城)을 하면서 저들의 형세를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성주는 부장의 말을 옳게 여기고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에만 주력했다.
이세적은 여러 차례 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희생만 치르고 물러났다.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도 신성을 함락시킬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을 설친 이세적은 꼭두새벽부터 부총관 손이랑을 불렀다.
“역시 신성을 함락시키기는 어렵구나.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성을 공략하는 데 집착하지 말라 했다. 이 성이 안 된다면 다른 성을 치면 될 일이다. 아무래도 남소성이 작고 지키는 군사도 적으니 그곳으로 가자.”
손이랑은 대총관의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성은 워낙 험한 곳에 위치했고 조직적으로 훈련이 잘된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만큼 당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조그만 남소성쯤이야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이세적의 군대는 야음을 틈타 남소성으로 내달렸다. 떠오르는 해와 함께 불쑥 나타난 당군을 본 남소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기겁했다. 당군이 이곳까지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남소성주 우진(寓珍)은 동요하는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싸울 준비를 했다. 당군은 기세 좋게 남소성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하지만 남소성의 군사들은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당나라 군사들이 몇 차례 공격을 퍼부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이세적은 남소성도 여의치 않자 다시 군사를 거둬 목저성으로 향했다.
당군이 목저성에 이르렀을 때 신성과 요동성의 군사들이 남소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애초에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던 이세적은 황급히 개모성을 우회해 요하를 건너 통정진 방면으로 달아났다.
그 해 7월 어둠이 짙게 내린 어느 날 밤, 청구도행군 대총관 우진달은 부총관 이해안과 함께 정병 2만을 이끌고 비사성 항구에 상륙했다. 이 무렵 비사성의 성주는 걸회수였다. 그는 고당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워 예전에 지었던 죄를 사함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사성의 성주로 임명됐다.
걸회수는 지난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나가 싸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성을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그는 부하 장수들에게도 다짐을 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성을 지키는 것이다.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
우진달이 여러 차례 도발했지만 고구려군은 그때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우진달은 부총관 이해안을 불러 상의했다.
“성에서 도통 반응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곳에서 허송세월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비사성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저들이 성에서 나와 싸우지 않는다면 몇 년이 걸려도 함락시키기 어렵습니다. 굳이 성을 함락시킬 필요가 없다는 폐하의 지시도 있었으니 이곳을 떠나 석성(石城)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나타나면 고구려군이 놀라 나자빠질 겁니다.”
달리 방법이 없던 우진달은 부총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당군은 비사성을 뒤로 한 채 배를 타고 요동반도 남단을 거쳐 석성으로 나아갔다. 석성은 요충지가 아니었기에 성의 규모도 작고 군사도 별로 없었다. 갑자기 당의 대군이 나타나자 석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신세가 됐다.
성주 마혜진(馬惠眞)은 아녀자까지 총동원해 죽기 살기로 항전에 나섰다. 그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당군에게 화살 세례와 함께 바위와 통나무를 던졌다. 이 때문에 당군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격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당군이 물러나자 성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들은 야음을 틈타 성 밖으로 나와 그들의 영채를 기습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전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성과도 없이 자꾸 시일만 흘러갔다.
비 오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 날도 우진달은 전력을 기울여 총공세에 나섰다.
성주는 군사들을 독려해 악착같이 당군을 막아 냈다. 하지만 잔뜩 독이 오른 당군의 총공세를 막아 내는 건 어려웠다. 당나라 군사가 하나둘씩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마혜진과 수하들은 당군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족족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당군을 감당하기에는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을 빼앗기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마혜진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로 했다.
그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싸우다 죽겠다!”
성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앞으로 나가면서 십여 명의 당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당군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여러 명을 더 베었지만 이미 지친 상태로 많은 군사와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칼 놀림이 무뎌지더니 결국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부하들에게 부르짖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성을 지켜야 한다!”
마혜진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에 고구려 군사들은 끓어오르는 감동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부장 염죽(鹽竹)이 절규하듯 말했다.
“성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당나라 놈들을 쳐죽이자!”
염죽의 외침과 동시에 분노한 고구려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당군에게 달려들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아귀처럼 덤벼드는 기세에 눌린 당군은 뒷걸음질치다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성벽에서의 백병전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됐다. 고구려군은 악전고투 끝에 날이 밝아서야 당군을 완전히 성 밖으로 내몰 수 있었다.
전력을 쏟아붓고도 패퇴한 우진달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가 망연자실하고 있자 부총관 이해안(李海岸)이 위로했다.
“우리가 희생을 치른 만큼 고구려군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체면은 세웠으니 이제 군사를 거두시지요.”
대총관은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겠는가?”
이해안이 헛기침을 한 후 대답했다.
“이 근처에 있는 적리성(積利城)을 치는 게 좋겠습니다. 석성보다는 공략하기 수월한 곳이니 전과를 올리기에 적합합니다.”
“고구려 조정에서도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챘을 텐데 가만히 있겠는가?”
“고구려의 지원군이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 사이 적리성을 함락시키면 됩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그들은 영채를 뽑아 짊어지고 적리성으로 나아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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