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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석성이 당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동성과 건안성의 군사들은 곧바로 구원에 나섰다. 이는 요동의 성 간의 협조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진달의 군대가 적리성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지원군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우진달은 기겁을 하고 부총관에게 애원조로 물었다.
“요동성과 건안성의 고구려 군사들이 곧 당도할 것이라 하는구려. 어찌하면 좋겠소?”
이해안은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입니다. 자칫하면 적지에서 고립될 수 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고 일단 후퇴하십시오.”
우진달은 돌아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폐하께 면목이 없지 않을까.”
“이번 원정의 목적은 고구려의 내지를 교란시키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활약만으로도 맡은 바 임무를 충분히 수행한 겁니다.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시면 어디 농촌 마을이라도 습격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백성을 잡아서 포로로 끌고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총관은 부총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당군은 주변을 돌며 마을을 불태우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농부들을 잡은 후 서둘러 배를 타고 산동의 내주로 허겁지겁 돌아갔다.
당 태종은 요택의 진창에서 얻은 등창이 악화되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국정의 전결권을 태자인 이치(李治)에게 맡기고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고구려를 정복하겠다는 그의 집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방현령을 비롯한 현신들의 반대에도 고구려 정벌에 나설 준비를 했다.
태종이 원정에 앞서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해군의 육성이었다. 지난번 고구려 성의 방어 체계에 막혀 참패를 당한 이후로 강력한 해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647년 8월에는 송주 자사 왕파리에게 명해 수백 척의 배를 만들게 했고, 이듬해에는 검남도와 월주·무주·호주 등지의 조선소에 1000여 척의 거함을 건조하라 했다. 또한 물에 익숙한 양자강 유역의 장정들을 징발해 조련했다.
고구려를 능가하는 해군만 가질 수 있다면 험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 바닷길을 통해 평양을 직접 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서력 648년 당 태종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키운 해군의 전력을 시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먼저 우무위 대장군 설만철(薛万徹)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행방(裵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았다. 그들은 군사 3만여 명을 누선(樓船)에 태우고 내주를 출발해 요동반도 남단으로 나아갔다.
요동반도의 남쪽 끝인 청리포에 상륙한 당군은 군사를 휘몰아 비사성을 기습했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방비가 한층 강화된 비사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설만철은 비사성 함락이 여의치 않자 묘도 군도 최북단의 섬인 오호도(烏胡島)로 선단을 물린 후에 상황을 살폈다.
당군은 진작부터 오호도에 진을 설치하고 비사성의 동태를 살펴 왔다. 오호진의 수장은 고신감(古神感)이었는데 공명심만 있고 참을성이 없는 자였다.
지루한 탐색전을 지속하던 어느 날 고신감은 대총관에게 나아가 청했다.
“비사성 공격을 허락해 주십시오.”
“비사성은 쉽게 함락할 수 있는 성이 아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함락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설만철도 만류하기 어려웠다.
“좋다. 너에게 1만의 군사를 줄 테니 나아가 싸워 보라.”
승낙을 받아 낸 고신감은 오호도를 출발하여 호기 있게 비사성으로 향했다.
야음을 틈타 비사성 남쪽 해안에 상륙한 고신감의 부대는 성으로 진군했다. 곳곳에 배치한 파수병을 통해 당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비사성주는 부장 노웅(弩雄)에게 보기병 5000명을 이끌고 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역산(易山) 기슭에 매복하라 일렀다. 그리고 자신은 군사 1만을 이끌고 해안을 따라 내려가 부둣가에 다다랐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미리 알고 기다리는 상대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고신감은 역산을 지나다가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들에게 기습을 받았다. 그는 간신히 몸을 빼내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당군 대부분은 황천객이 됐다.
고신감은 간신히 도망쳐 당선이 정박해 있는 해안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눈을 씻고 살펴보니 타고 온 배들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걸회수가 당군이 성을 향해 이동한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고신감은 뒤따르던 몇몇 군사를 이끌고 도리진 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그곳에서 쪽배를 타고 간신히 오호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신감이 군사를 모두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설만철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러고 나서 당 태종에게 전령을 보내 청죄(請罪)했다. 당 태종은 마음 같아서는 그들 모두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그동안 애써 길러 온 해군 장수들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태종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나중에 고구려와 싸워 이기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했다.
서력 648년 9월, 당 태종의 명을 받은 설만철이 선단을 이끌고 오호도를 떠나 압록강 하구로 진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군사 도수금과 해군 원수 온사문을 급히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저 흉악한 당나라 도적들이 또다시 침략했다 하오. 이번에는 해군을 동원해 압록수까지 쳐들어왔구려. 사갈 같은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겠소?”
그러자 도수금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당군이 장산 군도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해군의 눈을 피해 압록수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심상히 넘길 일이 아닙니다.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저들의 항해술이 향상됐다는 것입니다. 근래 요동 일대에서도 당군의 간헐적인 침입이 있었던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발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심각한 표정으로 온사문에게 물었다.
“당의 전함은 이전에 비해 어떤 점이 달라졌소?”
“우선 쇠뇌가 장착됐습니다. 이전에는 배 위에서 활을 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접근전을 펼쳐야 했지만 이제는 먼 거리에서도 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배가 크고 견고해져서 당파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우리 해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요?”
“전함 500척에 군사 1만2000명 정도입니다.”
연개소문이 도수금과 온사문을 번갈아 봤다.
“이번에 압록수로 진입한 당군은 어디로 향할 것 같소?”
도수금이 고심 끝에 대답했다.
“압록수 하구에 자리한 박작성(泊灼城)을 먼저 노릴 듯합니다. 저들의 병력 규모로 볼 때 오골성 등 주변 성에 주둔한 아군이 합세한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계속 군사를 보내는 당 태종의 속셈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온사문 역시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군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보인 당군의 움직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공격을 해 오기는 하지만 목표가 일정치 않은 데다가 전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있는 눈치입니다.”
연개소문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끊임없이 간헐적으로 공격을 해오는 거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종의 소모전이오. 시도 때도 없는 전투로 우리 군민의 정신이 해이해졌을 때 갑자기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오려는 속셈이오. 그러니 전후방 예외 없이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불안에 떠는 백성을 안심시켜야 하오.”
온사문이 대막리지에게 건의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 해군이 눈에 띄게 급성장했습니다. 우리도 그에 대응하여 해군의 전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도수금이 난색을 표했다.
“온 장군의 말씀이 틀리지는 않으나 우리에게는 그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나라의 재정이 피폐해진 데다가 비사성에서 거둬들이던 교역세와 항만 사용료 등이 전쟁 통에 제대로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비를 증강하는 건 무리입니다. 당장은 우리가 가진 전력을 십분 활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세민의 병세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합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그가 죽는다면 당분간 당군이 쳐들어오는 일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화제가 바뀌자 연개소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당주가 등창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는 들었소. 그런데 그렇게 상태가 안 좋소?” “첩보에 의하면 병세가 악화되어 태자 이치가 대신 국사를 전담하고 있다 합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개소문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섣불리 낙관해서는 안 될 것이오.”
회의가 끝나자 세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고구려의 운명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압록수 하구에 상륙한 당나라 설만철의 군대는 곧장 박작성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박작성 남쪽 40여 리 되는 지점에 이르러 진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당군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그는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맞섰다. 그러자 당군에서는 우위 장군 배행방이 나와 합을 겨뤘다. 양군은 총력을 기울여 싸웠지만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당군이 예상보다 강한 것을 깨닫자 소부손은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왔다. 박작성은 험한 산 위에 세워진 데다 압록수를 끼고 있었기에 외부에서의 공격이 쉽지 않았다. 배행방은 군사를 총동원해 박작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오골성주 고문(高文)이 안지성(安地城) 등 주변 성들에서 차출한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
고구려 구원군이 나타나자 설만철은 부총관을 불러 상의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신속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소. 저들의 군세가 만만치 않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오.”
배행방이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우리가 고구려군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게 실수입니다. 박작성도 함락시키기 어려운데 구원군까지 왔으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초조해진 설만철은 부총관에게 역정을 냈다.
“아무 방책도 없단 말이오?”
대총관이 다그치자 배행방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퇴로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적과 맞서 싸우다가 역부족이다 싶으면 빨리 달아나야 하니까요.”
이처럼 지휘부에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경비병이 들어와 고구려 진영에서 사자를 보내왔다고 알렸다.
설만철은 사자를 안으로 들이게 했다. 사자는 대총관에게 오골성주 고문의 서찰을 전했다. 이를 펴서 읽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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