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무열왕은 승려가 비범한 인물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내일 해가 질 무렵에 북천교(北川橋)로 가 보거라.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어스름이 내리자 원효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북천교로 나갔다. 다리 앞에 이르자 관리 복색을 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원효를 다리 아래로 밀었다. 하천이 제법 깊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물에 흠뻑 젖었다.
원효는 간신히 다리 위로 올라왔다.
관리는 미안한 표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폐하의 명으로 한 일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원효는 상대의 난데없는 행동에 순간 화가 났지만 무슨 뜻이 있으리라 여기고 참았다.
사내는 온몸에서 물이 떨어지는 승려를 데리고 다리를 건너 미려한 수목에 둘러싸인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들어가셔서 몸을 씻으십시오.”
건물 안 후원으로 인도한 사내는 욕탕이 딸린 별채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원효는 한동안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한기(寒氣)를 느끼고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봤다. 아직도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라 해가 지면 제법 추웠다. 원효는 일단 별채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등잔에 불을 붙였다. 등불이 켜지자 어둠이 움찔하고 물러났다.
방 안은 화려하면서도 아늑했다. 비단 금침이 깔린 침상은 자줏빛 휘장을 쳐서 한껏 멋을 냈고 격자무늬의 칸막이 장식과 봉황이 조각된 탁자에서는 장인의 품격이 느껴졌다. 한쪽으로 목욕탕이 딸려 있었다.
원효는 젖은 승복을 벗었다.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어 잠시 속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 해도 알몸이 되려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원효는 속옷마저 벗고 욕탕에 들어섰다. 막상 알몸이 되고 나니 허례허식의 굴레에서 벗어난 듯 자유로움을 느꼈다. 세상은 수많은 가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생을 구제해야 할 승려조차 공허한 관념의 유희에 빠져 현실과는 담을 쌓고 있었다.
세속에 찌든 승려들은 백성을 업신여기는 속세(俗世)의 귀족과 다를 바 없었다. 원효도 그들처럼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이제는 진정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았다.
원효는 압량군 남쪽에 자리한 불지촌 북쪽에 있는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薛)씨로 나마 담날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글공부보다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산짐승·나무와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원효가 학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찾아온 상실감과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은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는 이때부터 죽음이란 문제에 골몰했다. 각종 서책을 파고들면서 그 비밀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그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원효가 15세가 되던 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죽마고우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는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아무리 술을 마셔도 순간순간 엄습해 오는 삶의 무상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을 마신 원효는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와 어느 집 담장 아래로 달려가 속 안에 든 음식물을 게워 냈다. 이때 심하게 흔들리던 원효의 등에 갑자기 온기(溫氣)가 와 닿았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가득 찬 번뇌를 비우고 나면 세상이 한결 편하게 보일 겁니다.”
원효는 오물이 묻은 입을 닦아 내며 흐릿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봤다.
먹빛 장삼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에는 파르스름하게 깎은 머리에 둥그스름한 얼굴이 보였다. 취중에도 그가 승려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밤중에 그가 왜 자신의 등을 어루만져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효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승려는 거리낌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 원효가 먼저 승려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며, 충절과 대의는 뭐 하러 챙긴답니까. 산다는 건 결국 끊임없는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일 아닙니까.”
아직 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승려는 한참 원효를 뚫어지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
“시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지요. 누구든 생로병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다만,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승려의 말을 듣는 순간 술이 확 깬 원효는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 이치를 알 수 있겠습니까?”
“소승은 불법을 통해서 그 이치를 찾았습니다. 시주님도 정진하면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원효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었다.
승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원효가 다급히 승려를 불렀다.
“스님, 이 미련한 중생을 일깨워 주십시오.”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연못에 핀 연꽃과 같아서 마음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피어나 있을 겁니다.”
승려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원효가 멀어져 가는 승려의 등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법명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승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얼굴이 둥근 게 방울같이 생겼다고, 사람들이 방울이라 부릅니다.”
원효는 방울이란 이름을 입속에서 여러 번 되뇌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방울 스님의 법명은 대안(大眼)이었다. 그는 저잣거리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전파하는 인물이었다.
불도를 닦기로 마음먹은 원효는 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법을 탐구하는 데 정진했다. 하지만 불법의 세계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올바른 길이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계를 절감한 원효는 초개사를 떠나 황룡사(皇龍寺)를 찾았다. 신라 불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절이었기에 많은 고승과 구하기 어려운 불전이 있었고, 당에서 전해져 온 새로운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한다면 깨달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원효는 황룡사의 학승이 되어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불전을 섭렵하고 수도에 정진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깨달음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황룡사를 떠나 구도(求道)의 길에 올랐다.
원효는 명성이 드높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 때 국교로 인정된 이후로 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교세가 나라를 뒤덮을 정도로 확장됐다. 전국에 수많은 사찰이 생겨났고 많은 승려가 양성됐다. 그런데도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원효에게 지침이 돼 줄 만한 스승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면 허명(虛名)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만난 고승조차 원효의 끝없는 의문과 내적 결핍을 채워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한동안 운제산 항사사(恒沙寺)에 머물던 원효는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 고구려의 함흥 땅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신라보다 불교의 역사가 훨씬 길었기에 불법의 깊이가 더하리라는 기대가 그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었다.
함흥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고 사통팔달의 지리적 조건 덕분에 번화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 원효가 함흥성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 머무는 보덕(普德) 대사의 위명이 자못 높았다.
성읍을 끼고 흐르는 성천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니 반룡산이 보였다. 반룡산은 마치 어린 동생을 다독이는 인자한 누이처럼 함흥 땅을 감싸고 있었다.
낮고 완만한 산의 형세가 원로에 지친 원효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소담한 들꽃들이 길잡이처럼 산길을 따라 피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마음이 그윽해져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얼마 오르지 않아 산문(山門)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진한 목재 냄새가 풍겼다. 산문의 크기로 봐서는 절의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을 듯했다.
원효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합장을 했다. 이곳부터는 신성한 부처님의 도량(道場)이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 그는 산문을 지나 본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본당 앞에 이르렀을 때 젊은 승려 하나가 나와서 맞았다. 원효는 공손하게 합장한 후에 보덕 대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젊은 승려는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띠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참선(參禪)에 들어 계셔서 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스승이라 부르는 걸 봐서는 보덕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참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한번 참선에 들어가시면 2~3일 이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기다리실 수 있겠습니까?”
“천 리 길도 왔는데, 그깟 며칠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젊은 승려는 원효를 객방으로 이끌었다.
사흘이 지나도 대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원효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자연스럽게 승려의 일과에 따라 새벽에 일어나 불공에 참례하고 아침 공양을 했다. 낮에는 참선하고 경전을 읽는 한편 짬을 내어 절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연곡사의 일원이 됐다. 처음에는 서먹하게 여기던 승려들도 어느덧 그를 도반(道伴)으로 편하게 대했다.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목탁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이어 맑고 깊은 종소리가 산사에 퍼졌다. 잠이 깬 원효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벽 예불을 드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코끝에 새벽의 알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때, 맞은편에서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는 대원(大圓)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처음 이곳에 온 날 원효를 맞이했던 젊은 승려였다.
대원은 이미 원효의 매력에 빠져서 호의적으로 대했다.
“스승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참선이 끝났나 보군요.”
원효는 대원을 따라 보덕 대사의 처소로 찾아갔다.
대원이 문밖에 서서 원효가 당도했다고 아뢰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짜고짜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놈 꼴이 밖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서 밖이 어둡다고 안에서 물건을 찾는 팔푼이 같구나.”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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