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서력 656년, 세찬 바닷바람이 부는 선착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사내가 있었다. 차림새만 보면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오는 대갓집 아들인 듯했다. 그의 시선이 수리가 한창인 당항성(黨項城)에 머물자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평소라면 각지에서 몰려온 장사치들로 북새통을 이룰 시간이지만 도통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착장을 벗어나니 주변에 부러진 창과 꺾인 화살, 그리고 타다 남은 집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인이 사색이 되어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사내는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투구를 들어 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래 고구려와 백제가 자주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피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이때 당항성 쪽 언덕 위에서 한 떼의 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하인은 금방이라도 달아날 기세였다.
사내가 침착하게 하인을 다독였다.
“가만있어라. 보아하니 우리 신라의 군사들 같구나.”
무리의 선두에서 달리던 장수가 이들을 보자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군례를 올렸다.
“왕자님, 소신은 당항성주 찰문(察汶)입니다.”
사내는 기품 있고 당당한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내 지난날 이곳을 떠날 때는 선창을 떠도는 짐꾼들조차 활기찼건만 5년 만에 돌아와 보니 상전벽해(桑田碧海)로구나!”
사내는 바로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당나라 고종의 숙위(宿衛)인 김인문(金仁問)이었다. 숙위란 당나라에서 임금의 측근에 머무는 이웃 나라의 왕자를 지칭하는데, 일종의 볼모와 같았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당 태종과 손을 잡으면서 셋째 아들인 문왕(文王)을 숙위로 보냈고 고종이 등극한 이후에는 둘째 인문이 대신하게 했다.
이때 인문은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식견과 도량이 넓어 많은 사람의 아낌을 받았다. 고종도 그의 재능을 아껴서 늘 옆에 두고 담소를 즐겼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아도 향수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장안의 화려한 풍광이 금성 길가에 피어난 들꽃보다 못했고, 값비싼 미주(美酒)가 신라 농부가 마시는 막걸리보다 쓰게 느껴졌다.
인문은 부친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시도 그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고종의 반대로 발목이 잡혔다.
인문은 고국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 신라에서 들어오는 상인이 있으면 붙잡고 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신라가 고전하고 있다고 했다.
서력 655년, 신라 무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에 의해 북변의 30여 성이 함락된 일을 알리고 원병을 청했다. 인문은 고종을 알현하고 나오는 사신에게서 신라군이 여제(麗濟) 동맹군에게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신이 돌아간 뒤 고종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고국의 일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있을 수는 없었던 인문은 고종 앞에 나아가 간청했다.
“폐하께서 천명하신 대로라면 당과 신라는 한 몸이 아닙니까. 신라가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당이 될 겁니다. 부디 군사를 일으키시어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신라를 구원하소서. 폐하의 광휘(光輝)를 천하에 드리울 좋은 기회입니다.”
고종은 숙위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선왕이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보여 주고 싶었다. 이제껏 아버지에게 느껴 온 열등감을 단숨에 벗어던지고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선왕처럼 천재적인 전략가의 자질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사세를 꿰뚫어 보는 감각만은 남달랐다.
“고구려는 결국 짐의 손에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신라는 아군이 도우러 갈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인문은 고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는 걸 알았다. 고종은 옥좌에 등극한 후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고구려 공격을 중단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재개했다.
“그렇다면 소신이 신라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부왕의 뜻을 여쭙고 당과 협력할 방법을 의논해 보겠습니다.”
인문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고국에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었다.
“좋다. 정 그렇다면 신라에 다녀오너라. 내 빠른 배를 내어 주마. 신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당항성에 전화(戰火)가 빈번히 일어난다 하니 특히 조심하여라.”
고종은 인문을 언제까지고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역(異域)에 눌러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은 신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고구려와 백제의 초계선에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당항진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를 맞이한 고국의 풍경은 예상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들이 자주 쳐들어와 당항진이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주변에 거주하는 백성은 모두 당항성으로 피신해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성도 조만간 함락될 겁니다.”
가까이서 보니 성주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성벽 만큼이나 찢기고 깨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워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군사들의 행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 당장 금성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대책을 의논하겠소.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 주시오.”
인문은 말을 얻어 타고 그 길로 금성을 향해서 내달렸다. 당나라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당항성을 빼앗긴다면 신라에는 치명적이었다. 나라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듯이 메마른 겨울 들판에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삼현육각(三絃六角)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붉은색 옷자락이 바람을 가르며 원을 그렸다. 넘실거리는 노을처럼 붉은빛이 주위를 물들였다. 남녀가 짝을 지어 어우러지는 춤사위는 보는 이의 어깨가 절로 들썩일 만큼 흥겨웠다. 머리에 얹은 장보관(章甫冠)이 하늘로 솟구치는 듯하더니 가죽신이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28명으로 구성된 장엄한 악대가 연주하는 고각(鼓角)·생(笙)·간(竿)·저(箸)·공후(箜篌)의 소리에 맞춰 무용수들이 신명 나게 춤을 추었다.
무악(舞樂)이 끝나자 사방에서 환호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임자(任子)가 간사한 얼굴로 아뢰었다.
“이번에는 폐하를 위해 특별히 미마지(味摩之)의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군.”
“오(吳) 지역에서 유학한 후에 기악무(伎樂舞)에서 일가를 이룬 자입니다.”
“자못 기대되는구나. 어서 대령하도록 하라.”
의자왕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볍게 떨렸다.
기악무란 음악과 무용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재담이 뒤섞인 공양극(供養劇)이었다. 탈을 쓰고 춤을 추기 때문에 가면무(假面舞)라고도 했다.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백제 왕실을 중심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느리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미마지가 등장했다. 눈은 왕방울처럼 크면서 튀어나와 있고, 코는 끝이 뭉뚝하면서도 높은 데다가 이마와 눈에 주름이 깊게 팬 흑칠 가면을 쓰고 있었다.
“훔”하는 소리와 함께 미마지는 무겁게 땅을 밟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금강저가 들려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막아서는 듯 그의 동작은 상대를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씩 물러났다.
“대저 군왕은 악한 무리로부터 약한 중생을 구하고 불법을 지켜야 한다. 헌데 마군(魔軍)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때에 군왕이란 자가 미망(迷妄)에 빠져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법을 수호해야 할 자가 오히려 무너뜨리고 있으니 내 당장 달려가 주먹의 매운맛을 보여 주어야겠다.”
미마지가 재담을 늘어놓자 의자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옆에 서 있던 임자는 연신 국왕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쏟아 낸 말은 분명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주지육림에 빠진 임금을 질타하는 것이었다.
미마지는 원을 크게 그리며 한 바퀴 돌더니 사설(辭說)을 이어 갔다.
“독초는 아름다운 색을 뽐내고 맹수는 그림자를 숨긴다. 풍광이 아름답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어찌 목숨이 온전하겠는가.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매로써 다스리리라.”
의자왕이 무녀 금화(錦花)에게 빠져 눈과 귀를 막고 있다고 꾸짖는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음악이 경쾌하게 바뀌면서 미마지의 동작이 빨라졌다. 마군의 무리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듯 주먹을 어깨 위로 올렸다가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내질렀다. 숨을 멈추게 할 만큼 거센 바람이 일었다.
의자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솔잎처럼 퍼렇게 질렸다.
참다못한 임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어서 저자를 끌어내라. 시덕(施德)은 뭐 하느냐. 사자춤을 올려라.”
명을 받은 시덕 은고(恩古)는 급히 청사자와 백사자를 무대에 올렸다. 사자들은 몸을 구부려 구르면서 등장했다. 서로 마주 본 채 머리를 흔들더니 몸을 부딪치며 한바탕 신명 나게 춤을 췄다.
은고는 당황하고 두려워서 사자들의 현란한 움직임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마지를 임자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들은 같은 스승으로부터 음악과 무용을 배우고 기악무를 전수받은 동문이었다. 은고는 실력을 인정받아 궁궐의 전속 무용수가 되었고 그 뒤로 탄탄대로를 걸어 이제는 악극단의 우두머리로서 8품 시덕의 벼슬까지 올랐다. 반면 미마지는 일찍이 구도의 길을 택해 바다 건너 오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음악과 무용을 습득하고 연구하여 백제와 서방의 춤을 접목한 새로운 형식의 기악무를 만들어 냈다.
미마지는 사비성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고를 찾았다.
은고는 십여 년 만에 만나는 벗을 반갑게 맞이했다.
“내 들으니 국왕께서 풍류라면 사족을 못 쓰신다 하더군. 내가 임금 앞에서 기량을 펼칠 기회를 마련해 주게나.”
대뜸 찾아와서 국왕 앞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해 달라니 은교는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궁궐에서 공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 앞에는 아무나 설 수 있는 게 아니네. 저잣거리에서 춤추는 것과는 달라.”
절친한 사이라 해도 함부로 의자왕에게 추천할 수는 없었다. 만약 국왕의 마음에 흡족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자네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나 본데 그럼 한번 보고 결정하게.”
미마지는 은고가 말릴 사이도 없이 일어났다. 그는 발을 굴러 땅을 디디고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그러더니 눈에 보일 듯 말 듯 몸을 흔들었다. 그 순간, 은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는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지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시덕은 숲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 소리가 들릴 듯하여 귀를 기울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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