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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작의 영화를 감상할 때 크게 두 지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한 지점이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영상으로서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했는가에 있다면, 다른 한 지점은 영화가 원작을 어떻게 각색했는가에 있다. 물론 반드시 원작을 먼저 읽고서 영화를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나, 양자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작전이 해당 영화에 관한 이해를 더 깊고 풍성하게 해준다는 점은 맞는 듯싶다.
‘파과(2025)’도 그런 작업을 통해 한층 더 가치 있고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는 영화다. 구병모의 장편 소설 ‘파과(위즈덤하우스, 2018.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됐음)'를 각색한 이 영화는 노년에 접어든 여자 킬러 ‘조각(爪角)’의 복잡다단한 상황과 감정을 상당히 충실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구현하려 한 노력이 역력한 영화다. 조각이 드러내는 상반된 면모에 집중하면, 이 영화의 가치를 보다 타당하게 평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 상반된 면모는 그녀가 청부살인업자로서 행하는 정교하고도 서늘한 액션과 그녀가 노인으로서 느끼는 처연하고도 내밀한 심정으로 구성된다.
이 글의 비평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2시간이라는 작전 시간 제약이 있어서 많은 정보를 압축 전달해야(민규동 감독, 김동완 시나리오, ‘파과 각본집’, 위즈덤하우스, 2025, 253쪽. 이하 이 글에서 ‘각본’이라 약칭되고 그 옆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됐음)”했던 제작 환경도 고려하면, 영화의 가치와 한계를 더욱 타당하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혜영의 존재는 돋보인다. 60대로 설정된 주인공 조각을 연기한 그녀 또한 이순을 지났는데, 이는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에 관한 깊이 있는 몰입과 연기를 할 수 있는 배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인물과 배우의 나이가 겹친다는 이유로만 이혜영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해치는 잔인한 킬러로 살아오다가 한 가족을 지키려는 늙은 조각은 이혜영의 필모그래피에 색다른 입체감을 더한다.
그녀가 하명중 감독의 영화 ‘땡볕(1984)’에서 주막의 남자 손님들을 유혹해 앗아가려는 요녀 ‘향심’을 연기했으며 임권택 감독의 영화 ‘개벽(1991)’에서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남편 최시형을 위해 고난을 참는 “보편적이며 통속적인 어머니(93쪽)”로서의 아내를 연기했음을 기억한다면, 이번 ‘파과’의 조각은 간악한 요부와 강직한 양처 모두로부터 변별된다.
노년에 가까운 여성 배우가 액션 연기를 선보인 것도 관전 포인트다. 많은 타 영화들이 뜨겁게 폭발하는 느낌의 액션을 구사한다면, ‘파과’의 액션은 상대적으로 서늘하게 조립된 느낌이다. 이 “잔잔한 긴장감(‘각본', 43쪽)”은 청부살인이라는 어두운 범죄를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살해 대상을 냉철히 제거하는 조각의 능숙한 솜씨로부터 오는 바가 더 크다. 그 정확한 스킬을 초점화된 조각의 시선에서 묘사하는 원작 소설의 문법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사실적인 과격성과 디테일을 확보한 액션으로 잘 압축됐다고 보인다. 그 액션은 인물들의 온몸에 마구 낭자하는 핏물의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그럼에도 ‘파과’에서 더 중심에 놓인 테마는 조각이 자신의 “신체적 노화(43쪽)”와 ‘강봉회’의 가족들에 관련해 체험하는 감정의 “미세한 동요(‘각본’, 57쪽)”일 것이다. 이 늙음과 미동의 흐름은 “새벽빛(27쪽)”의 정조로 영화 전체에 퍼진 듯하다. 새벽이 밤으로부터 아침으로 흐르는 중간기이고 그런 새벽에 점점 밝아지는 빛이 미묘한 설렘을 자아낸다는 점을 참고하면, “새벽빛(‘각본', 31쪽)”은 조각이 냉혹한 킬러로 살아온 어두운 인생에서 타인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노년기로 넘어가면서 느끼는 불안과 떨림을 품은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다.
조각은 노화 때문에 육체 기능이 약해져 감과 소속 업체로부터 버려질 수 있음을 인지한다. 원작이 그녀의 그 복잡한 내면을 적정 수준의 섬세함으로 풀어낸다면, 영화는 다양한 쇼트들로 그런 섬세함을 갖추려 했던 것 같다. 조각은 집에서 혼자 TV를 보는데, TV에는 찰리 채플린이 “아이와 함께 식사하는 장면(‘각본’, 41쪽)”이 나온다. 이 장면은 찰리 채플린 감독 및 주연의 영화 ‘키드(1921)’에 나오는 것으로, 자식 없는 조각의 고독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그녀는 다친 “노견(‘각본’, 43쪽)”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 순간, 무심하던 조각의 표정에 미세한 파장이 스친다(‘각본’, 44쪽).”이 장면은 짧지만 묵직하다. 노쇠해지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조각의 촉촉한 시선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조각의 눈빛은 강봉회의 딸 ‘해니’를 납치한 ‘투우(배도영)’를 향해서는 매서워진다. 그 매서움 속에는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던 투우를 향한 그녀의 미안한 감정이 담겨 있기도 하다. 조각과 투우의 얽히고 설킨 관계는 플래시백 기법을 통해 주로 “회상(‘각본’, 22쪽)”이 되는데, 이러한 연출은 “무표정하게(‘각본’, 51쪽)” 연기하는 이혜영의 얼굴이 고요히 강조되는 영화 전체에 “희미한 태동같은(101쪽)” 아련함을 부여한다.
이 아련한 감성은 소설과 영화에서 사뭇 다른 결로 갈린다. ‘파과’가 원작의 어떤 자세함과 섬세함을 일정히 생략하고 액션적 볼거리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선택이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영 버전이 영화에는 최적의 대답이었음을 알게(‘각본’, 259)”됐다는 구병모의 판단도 쉽게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 영화 ‘파과(2025)’ 줄거리
청부살인업자 조각은 이순을 넘기면서 자기 건강이 망가졌음을 느낀다. 그녀는 다친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과일가게에 방문하면서 수의사 강봉회의 가족에게 묘한 애정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청부살인업자 투우는 조각에 대한 복수로 강선생의 딸 해니를 납치해 조각을 유인한다. 조각은 투우와의 사투 끝에 해니를 구하고 킬러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 민규동 감독 소개
민규동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로 ‘여고괴담 : 두 번째 이야기(1999)’를 꼽을 수 있다. 두 여고생의 애증이 담긴 이 영화는 슬픈 공포의 감성을 자극적이지 않고 선연하게 다룬 각별한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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