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왕은 백제 제사장 출신
『수서』 신라전에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기록이 있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인이다. 바다로 도망해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 왕이 되었다. 대대로 왕을 이어와 김진평(26대 진평왕)에 이르렀다[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真平].’
『수서』 기록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근거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 문헌 어디에도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기록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신라의 왕통 흐름으로 보아 백제인 출신이 신라왕이 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존재하지 않는 점도 근거로 꼽는다. 한마디로 초기 신라왕 중에서 백제인 출신으로 추정할 만한 왕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수서』는 7세기 초엽 당태종(이세민) 때 편찬한 사서이다. 당태종의 명을 받은 장손무기, 위징 등이 전(前) 왕조 수(隋)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수서』에 백제인 출신이 신라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게 된 사유를 추적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편찬자들이 과거의 어떤 기록을 참조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신라인의 증언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백제는 앙숙 관계로 백제 멸망을 앞둔 시점이다. 따라서 당에 파견된 신라인이 자신의 옛 왕이 백제인 출신이라고 증언할 리 만무하다. 당연히 『수서』 편찬자는 과거의 어떤 기록을 참조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수서』 기록은 나름의 신뢰도를 갖는다.
남해왕 출신에 대한 의문
남해왕은 2대 왕이다. 『삼국사기』는 남해왕을 박혁거세의 아들로 설정한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용의 출현’(쿠데타)으로 보위에서 물러난다. ‘두 마리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더니 폭풍우가 심하게 불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두 마리 용은 박혁거세의 왕위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승자용은 남해왕이며, 패자용은 진한 낙랑으로 망명하며 남해왕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금성(쇠성)을 포위하기도 한다.
특히 『삼국유사』는 남해왕이 박혁거세(알영부인 포함)를 죽인 다음 박혁거세 시신을 다섯 갈래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매장했다고 부연한다. 아무리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지만 박혁거세와 알영을 죽인 남해왕은 천하의 패륜아가 될 수밖에 없다. 같은 혈육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인 출신 신라왕
남해왕이 백제인 출신이란 근거는 왕명에 나타나 있다. 남해(南解)는 ‘남쪽으로 간 해(解)씨’를 가리킨다. 해씨는 백제왕족(시조 해온조)의 고유 성씨이다. 남해왕의 왕비 이름은 ‘아루(阿婁)’이다. ‘루(婁)’는 백제초기 왕인 다루왕(2대), 기루왕(3대), 개루왕(4대)의 ‘루(婁)’와 같다. 개구리(蛙)를 지칭하는 말로 백제에서는 귀하게 쓰인 글자이다. 따라서 남해와 아루는 이름이 말하듯이 백제와 관련이 깊다. 두 사람이 백제 출신이라는 증거이다.
남해왕은 시조 박혁거세의 왕호 거서간을 과감히 버리고 차차웅(次次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다. 박혁거세와의 차별화를 꾀한다. 『삼국사기』는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여 차차웅은 자충(慈充)이며 무당(巫堂)을 이르는 말로 설명한다. 남해왕은 정치지도자보다 제사장에 가깝다. 참고로 자충은 반절음 표기로 ‘ㅈ+ᅮᆼ’인 ‘중’이다. 스님이나 승려의 비속어인 중은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에서 유래한다.
『수서』와 『삼국사기』 기록의 단서들을 종합하면 남해왕의 실체는 이렇다. 남해왕은 백제 제사장 출신이다. 백제왕녀 아루와 연을 맺고 이후 어떤 사연으로 백제에서 쫓겨난다. 또는 남해가 백제왕녀 아루와 눈이 맞아 제사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수서』 기록이 ‘해도(海逃·바다로 도망감)’로 표현한 점은 나름 시사점을 가진다. 남해는 반란에 버금가는 대역죄를 범해 백제에서 축출된다. 이후 남해는 신라로 들어가고 정말로 반란을 일으켜 박혁거세와 알영을 죽이고 신라왕에 즉위한다.
남해왕의 뒤를 이어 태자 유리왕(유례)이 즉위한다. 유리왕은 남해왕의 직계혈통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유리왕은 용의 출현과 함께 서북쪽에서 몰려온 소나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다[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서북쪽의 소나기는 진한낙랑의 군사를 일컫는다. 남해왕에게 패해 진한낙랑으로 망명한 박혁거세의 직계 후손이 다시금 되돌아와 백제계인 유리왕을 몰아내고 박씨왕조를 부활시킨다.
일찍이 독일 역사학자 C.W. 쎄람(Ceram)은 『낭만적인 고대사의 산책』에서 역사는 민감함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민감함이 발견의 씨앗이라면 상상력은 씨앗을 발아시키는 동력이다. 지금처럼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기』에 매몰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비록 조각의 기록과 단서일지라도 합당한 조합을 통해 민감함을 찾고 또한 논리적 상상력을 펼친다면 얼마든지 우리 고대사의 ‘진실의 문’은 열릴 것이다.
『수서』 기록의 백제인 출신 신라왕은 남해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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