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헌의 스포츠 세상] 무관심의 ‘골짜기 세대들’ 세계를 향해 4강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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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나’가 무기… 조기귀국 선수 유니폼 늘 소지
U-20 월드컵 끝 아닌 시작…..한국 축구 기둥이 되길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6-28 06:31:10

▲ 박병헌 국제문화체육부장

40년 전 이맘때에도 온 나라가 축구 열풍에 휩싸였었다. 멕시코에서 열린 1983년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독사’ 박종환 감독의 한국 대표팀이 예상을 깨고 4강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적인 환영 행사로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육사 생도 시절 축구선수였던 전두환 대통령이 선수단을 청와대에 초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청소년들의 깜짝 선전에 놀란 외신들은 붉은 유니폼을 입고 투혼 하나로 악착같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이들에게 ‘붉은 악마’라는 호칭을 붙여 줬다. 한국 축구 대표팀의 공식 응원단이 ‘붉은 악마’라고 불리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축구가 FIFA 주관 세계 규모 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대단한 업적이었다.

40년 전의 그 감동과 열기를 떠올려보면 얼마 전 김은중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2023 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은 ‘멕시코 4강’ 때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에는 많이 모자라는 듯하다. 그것은 어쩌면 4년 전 폴란드에서 열린 2019 FIFA U-20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이 사상 첫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이강인(마요르카)이 준우승팀 선수로는 처음으로 대회 최우수선수(MVP)에게 주는 골든볼을 수상할 만큼 한국 축구가 훌쩍 커 버려 그만큼 국민에게 주는 임팩트가 줄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렇다 할 관심도 받지 못했고 첫 항해부터 순탄치 않았음에도 김은중호가 4강 반열에 오른 것은 높이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이강인 같은 스타 플레이어는커녕 K리그에서 확실히 자리 잡은 선수도 없었다. 다른 세대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가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는 ‘골짜기 세대’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불렸기에 그 성과가 도드라진다.

게다가 U-20 아시안컵 팀 내 최다득점자 성진영(고려대)이 부상으로 낙마했고, 대회 도중 박승호(인천)도 발목 골절로 이탈해 전력이 쪼그라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국제경험 부족, 갑작스러운 개최지 변경 등 악재도 잇따랐기에 조별리그 통과가 1차 목표였다.

그러나 김은중호는 반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서 거대한 돌풍이 휘몰아치고 파란이 일어났다. 2017년부터 U23 대표팀 코치로 활동하며 젊은 선수들과 꾸준하게 소통한 김 감독의 냉철하고 섬세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어린 선수들이 똘똘 뭉쳤고, 에이스는 없었지만 ‘원팀’으로 성장했다. 특히 팀워크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으며 ‘함께 하나’가 그들의 무기였다.

오른쪽 발목 골절 부상으로 일찍 귀국길에 오른 박승호의 등번호 ‘18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대회 기간 내내 벤치에 걸어 놓으며 ‘함께 하나’를 실천한 젊은 선수들이었다. 경기 전 베스트11 공식 촬영 때도 그 유니폼을 들고 찍었다. 선수들은 부상당한 동료를 잊지 않았다. 박승호는 눈물을 머금고 귀국했지만 마음은 지구 반대편의 동료들과 함께했다. 그 유니폼은 대표팀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였다.

▲ U-20 대표팀 선수들이 14일 인천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김은중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연합뉴스

스타가 없어도, 전력이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온다는 것을 보여 준 게 김은중호의 교훈이다. 매 경기 점유율에서 크게 밀렸고, 슈팅도 수없이 얻어 맞았다. 심지어 한국이 2-1로 승리한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슈팅 수는 9대23으로 절대 열세였다. 다른 팀들과 비교했을 때 선수들 개인의 기량 차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팀웍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협력수비로 상대 공격을 막았고, 그래도 뚫리면 몸을 던지는 육탄 방어로 슈팅을 저지했다. 축구에는 판정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90분 내내 계속 밀려도 결국 중요한 건 골이다. 어떻게 해서든 골을 더 많이 넣으면 이긴다. 김은중호가 그랬다. 한국은 대회 내내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선수 전원이 골문 앞으로 내려와 걸어 잠갔고, 버티면서 기회를 엿봤다. 공을 빼앗으면 스피드가 좋은 2선 공격수들이 뛰쳐나가 골을 노렸다.

김은중호 비장의 무기는 코너킥·프리킥 등 세트피스였다. 세트피스는 약팀이 강팀을 잡는 가장 좋은 무기다. 7경기에서 넣은 10골 가운데 6골을 세트피스로 만들어 냈다. 김은중 감독은 토너먼트 대회에서 세트피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세밀하고 정교한 세트피스 전술을 마련했고 이 전술이 제대로 맞아떨어져 선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2003·04년생들이 주축을 이룬 이번 대표팀은 스스로 동기를 만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겨야 할 이유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했고,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냈다. 우리 시대 자랑스러운 MZ 세대의 강점을 여실히 보여 줘 흐뭇할 따름이었다. 이들에게 4강에 오른 FIFA U-20 월드컵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김은중호 어린 선수들이 성장을 거듭해 성인 A대표팀에서도 다시 뭉쳐 한국 축구의 기둥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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