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환의 시사저격] 진짜가 나서서 가짜를 가려내야 한다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기획

5·18유공자 가짜 묵인하면 사회적 동의 못 얻어
민주화의 모범 영국엔 유공자 보상도 특혜도 없어

구월환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7-26 06:31:30

필자가 영국특파원 생활을 할 때 무슨 국경일 같은 행사가 열리면 훈장을 달고 나오는 민간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다소 생소한 장면이긴 했지만 이치적으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훈장은 바로 명예의 표시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유독 5·18 유공자들은 왜 자신의 공적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릴까? 혹시라도 이면에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면 심각한 문제다. 이는 역사의 진실과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 시대의 양심과 자존심을 위해서도 묵과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이 묵인되고 방치된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최근에 5·18 유공자 명단공개를 둘러싼 논란들을 보면서 잠시 영국을 생각해 본다. 영국은 민주화과정이 워낙 길고 또 파란도 많았던 나라다. 그럼에도 특별히 ‘민주화유공자’라는 단어를 본 적은 없다. 곧이곧대로 하면 ‘The Man of Merit for Democratization’이라고 해야 할 터인데 그런 표현이 신문이나 방송 또는 무슨 연설에서 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영국은 민주화를 위해 길게는 1215년 마그나카르타 이후 700년, 짧게는 1688년 명예혁명후 240년, 더 짧게 본다면 1832년 선거법 대개혁이 시작되어 1928년 보통선거법이 완성될 때까지 96년이 걸렸다. 이런 긴 세월동안 죽은 사람, 다친 사람, 감옥에 간 사람 등 이런 저런 유공자가 많지만 이들에게 유공자 자격과 보상금, 시험가산점 같은 특혜를 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명예를 유독 존중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찍이 명예를 위해 생사를 건 결투를 했던 사람들이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나면 앞을 다투어 나갔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얼마나 명예를 중시하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런던 지하철역에 화재가 나서 3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느 신문이 런던지하철공사 사장의 인책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는 즉각 그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화재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본인과는 인과관계도 없는데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만 객관적인 전문가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1년 후 결과를 발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여러 시정조치를 취했다. 30여 명의 집단 장례식도 없었고 시내 중심가에 추모 텐트도 없었고 정치인들의 ‘끼어들기’도 없었다. 엄청난 화재사건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1년이나 기다리는 정치나 국민성이 대단해 보였다.

또 민주화에 관한 영국 이야기를 하자면 1913년에는 대대적인 경마축제에서 국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여성이 투표권을 달라고 소리치며 경주마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는 4일 만에 죽었다.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의 죽음 이후 5년 만인 1918년 처음으로 여성투표권이 생겼고 10년 후에는 역사적인 보통선거법이 완성되었다. 그것이 역사의 진보다. 그의 이름은 자연히 역사에서 빛나고 있다. 특별히 ‘민주화유공자’나 ‘열사’라고 이름을 붙여야 빛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일류사학인 윈체스터 스쿨을 나왔는데 그의 자서전에서 동창생들의 절반이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고 적었다. 그만큼 명예를 중시한다는 표시다.

필자가 있었던 1980년대에는 북아일랜드 공화군(IRA)의 폭탄테러로 순식간에 수십명이 죽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는데 현장에는 추모의 꽃다발만 쌓일 뿐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족들이 정부를 향해 소리 지르거나 야당이 ‘퇴진’ 운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5·18문제도 정치 때문에 더 일이 꼬였다. 정치인들이 5·18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바람에 진상규명이나 유공자 심사 등 핵심 과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생겨났고 결국 사회적 합의에 실패했다. 사회적 합의가 안된 명예는 진정한 명예가 아니다. 인우보증이라는 형식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심사와 혜택이 향우회식 동창회식으로 이뤄졌다면 법률이 강제해도 사회적 동의를 받기 어렵다. ‘축하를 받아야 할 유공자’가 ‘숨기고 싶은 유공자’가 된다면 불명예다. 이런 억지춘향격 명예를 내세워 특혜를 누리고 5·18이 성역화되어 가는 것은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하루 빨리 중지하고 시정해야 한다.

어떤 금은방에 가짜가 있다고 한다면 진짜도 가짜로 몰리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니 가장 시급한 일은 진짜들이 나서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구월환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정기 후원
일반 후원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