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당신의 배춧국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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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7 06:31:20

김장철, 여느 해처럼 전화가 왔다. “최 교수, 김장했으니 와서 가져가라!” 친정 엄마처럼 챙겨주는 언니의 살가운 목소리다. 경기도 봉평에서 수확한 재료에다가 온갖 몸에 좋은 약재를 달여 양념을 한 명품 김장이 두 통이나 왔다. 고소한 무농약 배추도 덤으로 받았다. “배춧국 끓여 먹어.”

배춧국 끓이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랜 만에 한우 양지를 사고 그걸 폭 고아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내고 국물을 완성하는 데 사흘 걸렸다. 틈틈이 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배추가 냉장고에서 휴식한 기간까지 하면 열흘이나 지났다.

“완전 무농약이라 배추에 벌레가 있을 수도 있어.” 주말에 고소한 배춧국 맛을 상상하며 배추를 씻었다. 추워서 그런지 벌레가 없다. 큰 냄비에 하나 가득 만들고는 식히려고 베란다에 두었다. 다음 날 열어 보니 아뿔싸! 배춧국에 까만 게 둥둥 떠다니는 게 아닌가! ‘이게 뭐지?’ 눈이 침침한 나는 아들을 불러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그것은! 날파리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난. “엄마가 배추를 건성으로 씻은 거지? 무농약 배추니까 제대로 씻었어야지. 하긴 눈이 신통치 않으니….” 기대 가득했던 배춧국 한 냄비는 날파리 진상품이 되었고 열흘에 걸친 나의 무농약 배춧국 프로젝트는 폭삭 망했다. 거기 들어간 갖은 양념과 재료까지 생각하면 흑역사 끝판왕이다.

주말 내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다가 생산자인 언니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언니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번 김장 배추에 벌레는 없었다고 한다. 겨울이라 벌레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벌레는 꿈틀대는 애벌레 아닌가! 언니는 아마도 베란다에서 날파리가 날아 들어갔을 거라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에 국을 끓이고 좀 먹어 보았는데 그때는 아무 것도 없어 깨끗했다. “날파리는 아주 금방 생겨. 나눠 먹었다고 생각해.” 음식전문가인 언니의 견해이다.

잘 보이지도 않게 작은 날파리들은 따뜻한 배춧국에 잠겨 퉁퉁 불어 엄청 커졌다. 그들은 배춧국의 향기에 알에서 깨어나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돌진했을 것이다. 타고난 감각으로 진입로를 찾아 들어갔겠지. 모든 냄비에는 증기 배출구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달콤한 배춧국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뜨거운 배춧국 냄비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면서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결국 내가 한 일은 완벽하고 아주 큰 날파리 트랩을 만든 일이다. 그들이 굉장히 많아서 도저히 건져 낼 수 없었다. 집안의 날파리는 다 소탕되었다. 아무리 현명한 날파리라도 이 고급스러운 트랩을 피할 수 없었겠지. ‘내게는 무엇이 배춧국일까?’ 이런 생각에 잠겼다. 내게는 ‘일’이 배춧국이다. 일만 하면 아주 힘이 나고 일이 없으면 생기가 빠진다.

건강 때문에 일을 줄였는데 뒤돌아보니 ‘그 일’ 자리에 다른 ‘이 일’이 자리 잡았다. ‘오늘은 집에서 쉬어야지’ 했는데 하루 종일 집 정리·청소 이런 것을 하고 있다. 머릿속은 집 정리 도구로 꽉 차고 빼꼭하게 적힌 쪽지를 들고 다음 날 다이소로 향한다. 누군가는 이게 불안증이라고 조언했다.

‘배춧국’의 향기는 우리를 부른다. 빠져 죽을 줄 모르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있는데 일반적이랄 수 있는 게 칭찬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인간은 칭찬 들으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다.

춤 따위가 대수인가? 그 칭찬이 명백한 아부라는 걸 알아도 칭찬하는 사람의 줄인형 놀이에 놀아난다. 누구에게는 ‘배춧국의 향기’가 명예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돈이기도 하다. 사랑·신의·헌신·봉사·희생, 이러한 고상하고 값진 덕목이 그 향기이기도 하다. 그런 덕목들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생에 추동력이 되고 기쁨이 되어 준다. 단지 우리가 달콤함에 빠져서 에너지와 생명이 손실되고 있음을 자각하기 힘든 것뿐이다.

날파리들이 불쌍하다. 우리 집 날파리들은 행복했을까? 그래도 썩은 음식을 즐기며 조금 더 길게 살다가 간 것보다는 나았을까? 명품 배춧국을 맛보았고 아예 그 속에 풍덩 빠졌으니 괜찮은 생이었을까? 왜 배춧국에 둥둥 뜬 날파리들 잔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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