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223] 이승만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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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양녕대군의 후손이 아닙니까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8 06:30:20

독립협회 주관으로 민선의원 선거가 실시되기 전날, 서울 곳곳에 ‘박정양을 대통령·윤치호를 부통령·이상재를 내부대신·정교를 외부대신으로 선출해 국가를 공화체제로 세우려고 한다’는 내용의 익명서가 붙었다. 이 익명서는 독립협회에 의해 쫓겨난 전 참정 조병식이 꾸민 일이었다. 익명서는 곧 광무 황제에게 올려졌고 개혁파가 황제의 폐위를 도모한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황제는 개혁파를 체포하고 음모의 중심인 독립협회를 해산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등을 해임하고 조병세·조병식·박제순·민영기 등으로 새 내각을 꾸렸다.

황제의 명령으로 11월5일 새벽에 경관들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회장 윤치호는 경관들에게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재빨리 배재학당으로 피신했다. 배재학당은 미국 성조기가 걸려 있어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이상재를 비롯한 간부 17명은 잡혀갔다. 독립협회 지도자들은 역적이 되었고, 곳곳에서 총검을 든 경찰과 군인들의 검문이 살벌했다. 11월5일로 예정되었던 중추원 민선의원 선거는 무산되었다. 청년 이승만은 사람들을 이끌고 경무청으로 가서 독립협회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를 시작했다.

이승만은 1875년에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위의 두 형이 어려서 죽어 장손으로 성장했다. 3살 때 서울로 이사해 서당에서 공부했고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듬해인 1895년 4월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21살 때이다. 그는 배재학당 청년단체인 협성회에 들어가 1898년 1월1일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 회보는 3개월 후인 4월에 일간지 ‘매일신문’으로 거듭난다. 이승만은 같은 해에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들을 통해 이승만은 정치인으로서 커 나가고 있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너는 6대 독자가 아니냐? 몸을 잘 보존해야지,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

이승만이 한참 연좌시위하고 있을 때 이승만의 아버지(이경선)가 시위 현장에 달려왔다. 아들이 시위장에서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허둥지둥 온 것이다.

“아버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집안은 양녕대군의 후손이 아닙니까?”

이승만은 아버지께 죄스러웠다. 하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막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우남(이승만의 호). 저기, 아펜젤러 선생님이 오셨어!”

곁에서 함께 시위하던 양홍묵이 말했다. 양홍묵은 배재학당 학생으로 이승만과 함께 윤치호를 도와 독립협회 활동에 열심인 친구였다. 그는 ‘매일신문’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펜젤러 박사는 시위 소식을 듣고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걱정되어 경무청 앞까지 온 것이었다. 이승만과 양홍묵의 시선이 아펜젤러 박사의 눈빛과 마주쳤다. 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들을 그윽히 바라보고는 총총히 자리를 떴다. 현장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많았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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