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업이 달라졌어요”… 자사주 소각 쏟아낸 상장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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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이후 상장사 45곳 3조8031억 원 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 세워
밸류업發 주주환원 분위기 발맞춘 듯… 소각 의무화 주장도 나와

윤승준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3-13 10:06:08

▲ 1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12일까지 ‘주식소각결정’ 공시를 낸 상장수는 총 45곳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16곳) 대비 3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이날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연초부터 자사주 소각 공시가 쏟아지고 있다. 소각 규모만 4조 원에 육박한다. 1년 전보다 5배 많은 수준이다. 대기업 계열사부터 금융지주와 코스닥 중소기업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소각 공시를 낸 주요 기업의 주가도 우상향하고 있다. 다만 주주환원 분위기를 지속할지는 의문이다. 대주주가 자사주를 남용하지 않도록 소각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1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12일까지 ‘주식소각결정’ 공시를 낸 상장수는 총 45곳으로 집계됐다. 전년동기(16곳) 대비 3배 가까이 불어난 수준이다. 45곳이 발표한 소각예정금액도 3조8031억 원에 달했다. 이는 2021년(2조5426억 원)·2022년(3조5740억 원) 한 해 소각 규모를 넘어서고 작년 전체 규모(4조7626억 원)의 79.9%를 차지하는 수준이다.

자사주 소각이란 회사 주식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한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 주식 수가 감소해 주당 주가가 올라가는데 기존 투자자의 이익을 키워 통상 주주환원 정책으로 평가된다.

대기업이 자사주 소각에 적극 나섰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달 5일 7936억 원(491만9974주)의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다. 창사 이래 첫 소각이다. 삼성물산도 지난달 14일 보유 중인 자사주의 1/3인 7677억 원(591만8674주)을 소각하기로 했다. KT&G(3150억원)·SK텔레콤(2000억 원)·현대모비스(1500억 원)·금호석유(1291억 원) 등도 1000억 원 이상의 소각 계획을 밝혔다.

금융사도 적극적이다. 1월 말 하나금융지주(3000억 원)를 시작으로 BNK금융지주(130억 원)·JB금융지주(200억 원)·KB금융(3200억 원)·신한지주(1500억 원)·미래에셋증권(822억 원)·NH투자증권(500억 원) 7곳이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상대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코스닥 상장사도 16곳이 자사주 소각 소식을 알렸다. 이들 기업의 소각예정 금액은 총 921억 원이다.

▲ 크게 보기=이미지 클릭 / [그래픽=윤수진 기자] ⓒ스카이데일리

예년과 다른 자사주 소각 행보는 연초 정부가 내놓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따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밸류업 프로그램에서 자사주 매입·소각 관련 구체적인 계획 공시 등을 요구한 바 있다. 12일 자사주 소각 계획을 알린 NH투자증권은 “주주환원 정책 강화를 통한 주주가치 제고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등 정부의 금융정책에 발맞춘 선제적 조치다”고 했다.

주가 부양 효과는 컸다. 하나금융지주 주가는 자사주 소각 공시 전 4만6300원이었지만 공시 당일 4만7800원, 다음 날 5만2000원·5만5900원으로 3거래일 연속 뛰었다. KB금융도 소각 공시 전 6만4700원에서 공시 다음 날 6만7600원으로 급등했고 이후 7만 원대를 넘어섰다. 삼성물산은 공시 전날과 비교해 12일 현재 주가가 7.0%, 현대모비스는 10.4% 각각 올랐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지난해 6월 발표한 ‘자사주 보유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매입 공시보다 소각 공시에 오히려 더 큰 주가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자사주 매입 시에는 추후 처분 등의 불확실성이 있으니 주가에 일부만 반영됐다가 소각 시 그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더 크게 주가 반응이 나타나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을 지속할지는 의문이다. 밸류업 프로그램 분위기에 편승해 기업들이 일시적으로 자사주 소각에 나선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주주환원을 독려하면서 기업들이 무언의 압박을 느껴 자사주 소각을 늘리는 것 같다”며 “금융지주나 과거 공기업이었던 회사는 지배주주가 딱히 없어 자사주를 경영권 유지에 활용할 니즈가 없고 정부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사주 소각을 기업에 스스로 맡기기보다 의무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광중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우리나라에서 자사주는 회삿돈으로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상황이어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며 “원래 상법에서는 자사주를 취득하면 곧장 소각하도록 규정이 돼 있다가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완화되면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 규정이 사라졌는데 그 개정이 잘못됐으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배경으로 기업 경영이 불투명하고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유지되지 않는 점이 꼽히는데 이는 지배주주가 자사주를 활용하는 데서 비롯됐다”며 “자사주 소각으로 밸류업이 무조건 되진 않겠지만 대주주의 악용 수단인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해서 대주주의 횡포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다면 밸류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윤승준 기자 sjyoon@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