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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위기의 근본 원인은 재정 부족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국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누적된 신뢰의 붕괴, 이것이 가장 먼저 고갈된 자산이다. 기금 고갈은 그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연금 논의는 여전히 재정 추계, 고갈 시점, 보험료율 같은 기술적 쟁점에 갇혀 있다.
이 논의는 중요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원칙이 흔들리고 국회가 결정을 미뤄온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2007년 개혁 이후 한국은 보험료율을 한 번도 조정하지 못하였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는 연금 구조를 여러 번 개편하며 지속 가능성을 높였다. 이 차이가 한국이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정부의 정보 제공 방식도 신뢰를 떨어뜨렸다. 2018년 정부는 연금 고갈 시점을 2057년이라고 발표했지만 2023년에는 2055년으로 수정했다. 추계 방식이 달라졌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느낀 것은 정부의 장기 예측 능력에 대한 의문과 정책 일관성 부족이었다. 장기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가 진단을 자주 바꾼다면 국민이 이를 신뢰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층 불신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청년들은 연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약속을 믿을 근거가 없어서 연금을 의심한다. 연평균 6%대 수익률도 알고 연금이 사라지는 제도가 아니라 조정이 필요한 제도라는 점도 이해한다. 그러나 30년 뒤 오늘의 약속이 유지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불신의 뿌리는 바로 이 ‘확신 부재’다.
노동시장 구조도 불신을 더한다. 청년 비정규직 비율 38.1%, 이직률 33%라는 현실에서 보험료 납부 단절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여기에 국가 약속까지 불확실하면 국민연금은 안전망이 아니라 미래 부담으로 전환된다.
정치권의 태도도 문제를 키운다. 국회와 정부, 연구기관은 매년 국민연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지만 지난 10년간 실제로 처리된 연금 개혁 법안은 단 한 건도 없다. 토론회는 개혁을 준비하는 절차가 아니라 개혁을 미루는 명분으로 소비됐다. 행동이 없으니 신뢰도 쌓이지 않는다.
재정 논쟁 역시 본질을 피한다. 사전 국고 투입이든, 사후 보전이든 핵심은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 OECD 1위, 노인빈곤율 40.4%라는 구조적 압력을 안고 있다. 국고 지원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정부는 재정 여력이라는 말로 결정을 미루며 신뢰를 더 소진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본래 국가와 시민이 맺는 장기 사회계약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은 정권 변화에 따라 흔들렸고 정치권은 불편한 결정을 피하려 논의를 반복했다. 연금을 위험하게 만든 것은 재정 악화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한 국가의 태도였다.
지금 가장 먼저 고갈된 것은 기금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뢰다. 이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보험료 조정, 국고 투입, 수익률 개선 어느 것도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결국 국민연금 개혁의 핵심은 단순하다. 국가가 어떤 약속을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약속을 실제로 지킬 수 있는지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모든 개혁 논의는 기술적 설명에 머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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