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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대 재벌 중 한화그룹만큼 강렬한 원색의 이미지를 지닌 기업은 드물다. 그룹을 상징하는‘한화 오렌지 로고’는 타오르는 불꽃과 태양, 그리고 멈추지 않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는 그룹의 모태인 ‘화약’에서 출발해 인류의 새로운 개척지인 ‘우주’와 지속 가능한 ‘그린 에너지’로 나아가는 한화의 정체성과 깊게 맞닿아 있다.
한화의 70년 역사는 단순히 몸집을 불려온 과정이 아니다. 한화는 고비 때마다 기존의 성공 모델에 안주하지 않고 주력 사업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왔다. 그 중심에는 40년 넘게 그룹을 이끌며 대한민국 재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승부사로 불리는 김승연 회장의 확장 전략과, 이를 ‘함께 멀리’라는 상생의 철학으로 고도화하고 있는 김동관 부회장의 미래 테크 전략이 공존하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킴의 유산, 한국화약과 기술보국(技術報國)의 시작
2대 경영의 서막, 29세 청년 회장의 등장과 공포를 넘어선 전략
한화그룹의 뿌리는 1952년,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부산에서 설립된 한국화약(현 ㈜한화)이다. 창업주 현암 김종희 회장은 일제강점기 조선화약공판에서 실무를 익힌 정통 기술자였다. 해방 후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도로를 닦고 광산을 채굴하기 위한 산업용 폭약은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김종희 창업주는 ‘화약은 곧 국력’이라는 신념으로 화약 국산화에 투신했다. 미군정 시기, 서툰 영어로 미군 장교를 찾아가 “Do you know Dynamite?”라며 담판을 지어 원료를 확보했다는 일화는 한화의 창업 정신을 상징하는 비사로 남아 있다.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한 것은 한국 산업 현대화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화약 산업은 단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약속된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터져야 하는 화약의 속성은 훗날 한화의 경영 철학인 ‘신용과 의리’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다. 현암이 남긴 ‘사업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기술보국 정신은 오늘날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항공우주 기술로 계승되며 그룹의 핵심 DNA가 되었다.
1981년, 한화그룹은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59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타계하며 최대 위기를 맞는다. 당시 장남 김승연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29세의 청년이었다. 재계에서는 “한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창업 공신들과 백전노장의 원로 임원들 사이에서 서른도 안 된 ‘애송이 회장’이 권위를 세우기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김승연 회장은 이때 매우 정교하고 파격적인 심리전을 선택한다. 취임 직후 머리를 뒤로 바짝 넘긴 ‘올백 스타일’을 고수하고 카리스마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켰다. 그는 스스로를 거칠고 강한 리더로 포지셔닝하며 조직을 빠르게 장악했다. 훗날 그는 “너무나 두려웠지만, 내가 흔들리면 그룹 전체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강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의 경영 능력은 취임 이듬해인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솔루션) 인수를 통해 증명되었다.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석유화학 기업 인수를 놓고 내부 반대가 극심했지만, 김 회장은 “석유화학은 미래 산업의 기초”라며 밀어붙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화는 이를 통해 내수 화약 기업에서 글로벌 종합 화학 그룹으로 단숨에 체질을 개선했다.
M&A의 귀재, 63빌딩을 품고 금융 제국을 건설하다
‘함께 멀리’의 철학, 고용 보장과 하청·원청의 상생
김승연 회장의 리더십을 설명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공격적인 M&A’다. 그 정점은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였다. 당시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 기업이었으나 자산 규모는 국내 최대급이었던 대한생명을 품기 위해 김 회장은 직접 입찰 서류를 들고 현장을 누볐다.
인수 과정에서 그는 경쟁사였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을 찾아가 “금융업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시면 형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잘 운영해 보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경쟁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 겸손하면서도 전략적인 행보는 삼성의 묵시적 지지와 함께 인수의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 인수가 마무리되면서 한화는 여의도의 랜드마크인 63빌딩의 주인이 되었고, 제조 중심의 그룹 포트폴리오에 ‘금융’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게 되었다. 현재 한화생명을 필두로 한 금융 부문은 그룹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축으로 성장했다.
한화그룹의 독특한 기업 문화인 ‘의리’는 2010년대에 들어서며 김승연 회장의 ‘함께 멀리’ 경영 철학으로 구체화된다. 김 회장은 “혼자 빨리 가기보다 함께 멀리 가야 한다”며 협력업체를 단순히 하도급업체가 아닌 ‘가족이자 동반자’로 정의했다.
그 진정성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한화는 주력 사업인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매각하면서 “매각 대금을 수천억 원 깎아줘도 좋으니, 우리 직원들의 고용만큼은 100% 승계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식구의 생존을 챙긴 이 사례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구조조정의 모범”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상생 정신은 현재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최근 한화오션은 협력사 직원 1만5,000여 명에게 직영 근로자와 동일한 비율의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원·하청 간 차별이 당연시되던 조선업계에서 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이를 언급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헌법적 원리이며 바람직한 노동 문화”라고 격려했다. 또한, 과거 대우조선 시절부터 얽혀있던 470억 원 규모의 하청노조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한 것은 갈등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김동관 부회장의 상생 의지가 반영된 결정적 조치였다.
빛과 그림자, 리더십 논란과 오너 리스크의 교훈
강한 카리스마와 의리를 중시하는 리더십의 이면에는 언제나 긴장도 함께 존재한다. 김승연 회장의 경우도 개인적 결단과 조직 운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이는 한화의 브랜드 이미지에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이후에도 오너 일가 3세들의 잇따른 사회적 논란은 한화가 넘어야 할 고질적인 과제가 됐다. 이러한 논란들은 한화가 사회적 책임(ESG) 경영을 강화하고 지배구조를 투명화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국민적 평판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다. 리더의 인간적 면모가 ‘의리’로 칭송받기도 하지만, 공공의 윤리를 넘어설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 됐다.
한화가 준법경영과 내부 통제 강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배경에 과거의 실수가 배경이자 토양이다.
대전환의 분수령, 삼성-한화 빅딜 K-방산 주권 확보
3세 경영의 개막, 김동관 부회장 ‘미래 테크 전략’
2014년, 한화그룹은 대한민국 M&A 역사에 남을 대형 거래를 성사시킨다. 삼성그룹으로부터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 등을 인수하는 ‘삼성-한화 빅딜’이다. 이 빅딜을 통해 한화는 단순한 탄약 제조 수준을 넘어 자주포(K9), 항공엔진, 첨단 레이더 및 위성 시스템을 아우르는 글로벌 종합 방산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방산’ 수출 신화의 하드웨어적 토대가 되었다. 김승연 회장의 전략적 결단이 국가 전략 산업의 포지셔닝과 맞물려 거대한 시너지를 창출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2023년 한화오션을 인수함으로써 한화는 육·해·공과 우주를 잇는 통합 방산 체계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게 되었다.
이제 한화의 시선은 지구를 넘어 우주로 향하고 있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은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 리더십을 바탕으로 그룹의 체질을 ‘디지털·그린·테크’로 혁신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제조 방식에서 탈피해 태양광 사업을 10년 넘게 뚝심 있게 밀어붙여 세계 1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김동관 부회장은 “최첨단 AI 기술로 자주국방에 기여하고 협력사들과 경쟁력 있는 국내 방산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상생경영은 과거의 갈등을 씻어내고 미래 성장동력을 함께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스페이스 허브’를 통해 추진하는 민간 주도 우주 산업(New Space)과 누리호 발사체 엔진 제작은 한화의 향후 70년을 책임질 핵심 동력이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진심어린 공헌
한편, 한화의 ‘함께 멀리’ 철학은 비즈니스를 넘어 사회공헌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26년째 이어오고 있는 ‘점자달력’ 배포는 시각장애인 한 명의 메일에서 시작된 진심어린 활동이다. 올해는 그 수량을 4만 부까지 늘려 차별 없는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1999년 시작된 ‘서울세계불꽃축제’는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익적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으며, 올해는 김 회장의 당부에 따라 ‘더 높이, 더 크게’ 연출하여 100만 시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했다. 미래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 ‘한화사이언스챌린지’와 청소년들에게 정통 클래식을 교육하는 ‘한화청소년오케스트라’ 역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추진되어 온 한화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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