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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기업들의 보안 수준이 ‘무방비’에 가까운 상태로 드러나며 해킹에 대한 국민적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SK텔레콤, KT, 롯데카드 등 통신과 금융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지만, 사후 대응은 안일하고 사전 예방은 부재했다. 기술적 실패가 아니라, 기업 최고경영진의 ‘보안 리스크 인식 부족’과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구조적 위기다.
최극 민병덕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개인정보 유출 현황 자료에 의하면 2021년부터 올해 7월까지 8854만 건이 유출됐다. 올해 7월까지 유출 건수는 778만 건으로, 최근 발생한 3사의 유출 건수는 포함되지 않았으니 이를 합하면 1억 건이 훌쩍 넘는다. 국민 한 사람당 두 차례는 개인정보 유출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줄 서서 유심 바꾸고 소액결제 신고하고 카드 교체하느라 어지간히 바쁘게 살아야 할 처지다.
최근 굵직한 사건만 보면, 국민들은 지난 4월 SK텔레콤의 유심 인증 정보 2696만 건이 유출되는 역대급 해킹 사고를 겪었다. SKT는 2016년 10월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어 경고가 내려진 운영체제를 무려 8년 반 동안이나 패치 없이 방치했고, 상용 보안 프로그램도 전혀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해커들은 이미 2021년 8월에 SKT 내부망에 침투해 악성코드를 심어놓았고, 2022년에도 추가 침입 흔적이 포착되었지만 회사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거나 차단하지 않아 마침내 2025년 4월 대규모 유출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국 SKT는 과징금 1347억 원이라는 역대 최고액의 처분을 받았지만, 인재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고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KT의 해킹 사고 역시 내부 대응의 민낯을 드러냈다. 지난 여름 수백 명의 피해자가 무단 소액결제 피해를 입었고, 경찰 수사 결과 차량에 펨토셀을 싣고 돌아다니며 전파를 탈취하는 ‘워 드라이빙’ 방식의 해킹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일부 피해자들은 카카오톡을 통한 인증 수단까지 도용당한 정황이 확인되는 등 피해자의 숫자가 불어나며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KT는 사고 초기 해킹 가능성을 부인했고, 핵심 서버를 폐기해 증거 자료 제출을 거부하며 은폐 의혹까지 자초했다. 자체 조사에서도 수개월 전부터 이상 징후가 있었음에도, 이를 외부에 보고하지 않은 점은 신뢰를 뿌리째 흔들었다.
특히나 KT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대규모 보안 사고를 겪은 전력이 있는데다, SK텔레콤 해킹 사고 직후에는 일부 KT 대리점에서 ‘SK 해킹’이라는 문구를 포함한 마케팅 문구를 내걸기도 했다. 피해 고객의 불안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이러한 행위는 통신업계 전반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처사라는 지적을 받았다.
통신 부문에 이어 금융권도 대형 사고를 터뜨렸다. 9월 롯데카드의 온라인 결제 서버가 해킹되며 297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이 중 28만 명의 정보는 카드번호, CVC, 주민등록번호까지 포함된 민감 정보였다. 롯데카드는 사고 이후 전담 조직을 구성해 카드 교체와 보상 절차에 나섰고, 향후 5년간 1,100억 원 규모의 보안 투자 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모회사 MBK파트너스의 실적 중심 경영이 보안 예산 축소로 이어졌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IT 인프라 투자 비중은 인수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사전 예방보다 사후 수습에 치중해왔다는 점에서 구조적 문제로 지적된다.
심각한 건 22일 MBK는 롯데카드 보안 투자를 꾸준히 확대해왔고 관리 소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위기 돌파를 위한 무모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카드 교체하느라 해지 방법 찾느라 고단한 고객들 대응이 엉망인 상황에서 적절한 대책인가 싶다.
또 정부와 금융당국은 연이은 사고에 “보안은 이제 비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레퍼토리가 시작된 게 20년이 넘었다는 게 문제다.
기업들은 여전히 단기 성과에 매몰된 채, 보안과 안전을 우선순위에 두기를 꺼려한다. 충분한 보안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피해였다는 항변이 해킹 재발 방지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건설노동자의 잇따른 사망 사고와 연이은 대형 해킹 사태는, 한국 기업 문화 전반에 뿌리내린 ‘위험의 일상화’에 대한 경고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사고 속에서 국민은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개인정보가 털리는 순서를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정치권도 이제는 보여주기식 호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규제와 처벌 강화만이 해법일 수는 없다. 기업이 보안과 안전에 선제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려 정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단기 실적이 아닌, 장기적 신뢰와 생존을 위한 투자에는 충분한 인센티브가 부여되어야 한다.
사후약방문식 처벌보다는, 국민을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보안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백신처럼 미리 제공하는 정책에 초점이 맞춰지길 기대한다. 강력한 규제와 함께 실질적인 유인책이 병행될 때, 기업의 인식도 바뀌고, 사회 전체의 위험 회피 역량도 높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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