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정권의 ‘적폐 청산’으로 잘못 시작한 對日 외교
/기피 인물을 상대국가의 외교 사절로 강요하기도
/4년 만에 완전히 뒤바뀐 위안부 합의와 징용 입장
/일본에 주도권 내주고 사정사정하는 모습 자초해
/감정과 이념에 매몰되면 이렇게 될 줄 몰랐는가
문재인 정권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큰 목소리로 외치자, 지지자들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고 화답했다. 지지자들이야 한번 해본 말일 텐데도 문 정권이 그 말에 고무되어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본 분야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일관계다.
최근 들어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 노선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 문 정권이 ‘친일파’ ‘토착왜구’로 비난했던 바로 그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전과는 정확히 180도 바뀐 태도 수정은 지난 4년 임기 동안의 학습 효과일 수도 있고, 돌파구 모색을 위해 전략적 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더라도 현 정부의 외교 성적표를 산출해볼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문 정권의 한일관계는 ‘적폐 청산’으로 시작됐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2015년 박근혜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적폐’로 지목했다.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고간 모든 협상 과정을 샅샅이 뒤졌다. 국제사회에서 공유되는 외교문서 비공개 원칙은 안중에 없었다. 두 사람이 다투다가 어렵게 손을 잡고 일을 끝내기로 했는데 어느 한쪽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그동안 오갔던 적나라한 말들을 까발린 것과 같았다.
아무리 일본이 우리에게 ‘지은 죄’가 많은 나라라도 문 정권이 국내 우파 세력 몰아내듯이 외교를 펴는 것은 한 번 더 따져볼 일이다. 외교에서 가장 금물은 눈앞의 감정과 이념에 치우쳐 실리와 국익을 놓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다른 문제로 인해 혹시라도 공수(攻守)가 뒤바뀌는 상황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 정권의 ‘하고 싶은 대로’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이때의 하이라이트는 위안부 합의 문제를 담당한 태스크포스 위원장을 오사카 총영사로 파견한 일이었다. 상대방으로서는 악역(惡役)을 한 사람을 외교 사절로 보내온 것이다. 가뜩이나 부글거리는 속에다 불을 지른 격이었다. 우리 외교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것이고 너희들과는 별로 잘 지낼 뜻이 없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한일관계는 역대 최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문 대통령의 “일본은 우리의 동맹이 아니다”라는 발언이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 면전에서 이뤄졌다. 또 다른 갈등의 시발이었던 징용 판결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독립성 때문에 관여할 수 없다”고 수수방관했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서자 우리 측은 경제와는 무관한 안보 문제를 지렛대로 삼겠다며 지소미아 종료 선언으로 맞섰다. 지소미아로 간접 연결되어 있는 미국까지 어이없어 했던 전략이었다.
여기에 우리 해군의 일본 해상자위대 레이저 조사(照射) 갈등이 일어났고 위안부 합의로 만들어진 화해 치유재단이 설립 취소되면서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다. ‘하고 싶은 대로’의 연속이었다.
얼마 전 일본에 부임한 강창일 주일대사도 같은 사례다. 강 대사는 국회의원 시절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빼앗겼다고 억울해 하는 쿠릴 열도를 방문해 파문을 일으켰다. 본인은 ‘현지 시찰’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누가 봐도 눈길 끌기용 ‘쇼’를 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쿠릴 열도를 방문하는 건 본인의 자유이지만 외교 일선에 상대국의 기피 인물을 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주미대사에도 반미 성향으로 널리 알려진 문정인 씨를 보내려고 했던 걸 보면 특히 일본과 미국에 대해 상대방이 싫어하는 인사를 강요하는 게 문 정권의 ‘악취미’인가도 싶다.
이런 독특한 외교 방식도 성과를 얻어낼 수만 있다면 대안이 될 수는 있다. 기존 틀을 깨는 ‘벼랑 끝 외교’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최근 정권의 다급한 행보를 보면 스스로도 실패를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호기롭게 견지해 왔던 위안부 합의와 징용 판결 등에 대한 기존 입장들이 모두 번복됐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가 한일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한 것은 놀라웠다. 위안부 합의 직후 “(일본에게 받은) 10억 엔에 우리 혼을 팔아넘겼다”고 일갈했던 그다. 말을 바꾸는 것에 대한 일말의 송구스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아울러 “징용 문제에서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판결이 실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기업 재산의 현금화에 반대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민주당 의원들도 일본을 방문해 “대법원도 한일관계에 파국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현 정권은 박근혜정부 때 외교부가 징용 판결에 대한 의견서를 대법원에 낸 것을 ‘재판 거래’ ‘사법 농단’으로 가차 없이 몰아세웠던 사람들이다. 해당 의견서는 판결이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을 다룬 정도였으나 현 정권의 발언은 노골적인 법원 압박이다.
강창일 대사는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다. 일본 부임에 앞서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한 보도들이 ‘가짜 뉴스’라고 주장했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천황 폐하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가야 한다”며 ‘천황 폐하’를 강조했다. 위안부 합의는 아직 파기되지 않았다고도 했다. 현 정권은 “도쿄 올림픽을 보이콧 하겠다”고 벼르더니 최근에는 “도쿄 올림픽에 한국이 기여하고 싶다”(남관표 전 주일대사)고 말을 뒤집었다.
‘이니 마음대로’가 초래한 가장 나쁜 결과는 한일관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일본에 내준 일이다. 일본은 고자세로 나오고 우리는 사정하며 매달리고 있다. 한미일 공조를 중시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과,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관계 개선 시도 등의 요인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외교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외교를 포커와 바둑에 비유하기도 한다. ‘감정 관리’ 면에서는 포커처럼 자기 수를 읽히지 않게, 전략 측면에서는 바둑처럼 몇 수 앞까지 내다보며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 정권의 일본 외교는 이 점에서 실패의 전형이다. 여기서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은 ‘하고 싶은 대로’ 외교를 하게 되면 이런 낭패를 당할지 몰랐던가 하는 점이다. 암담한 심정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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