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삶은 얄궂게 우리의 예상을 비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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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1-24 06:30:50

이번 겨울은 눈 인심이 좋다. 커다란 눈송이가 하루 종일 세상을 가득 채워 주니 이런 눈 호강이 없다. 어렸을 때는 눈이라면 무조건 좋고 별천지로 들어간 기분이었지만 나이 들면서 눈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전락했다. 집 앞의 눈을 치워야 하고 미끄러운 길에 나들이도 힘들다. 얼마 전 내린 눈에 친척아저씨 한 분은 복사뼈가 세 동강이 났다. 어르신들에게 눈이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뜻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등교 시 버스에서 내리면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 버티고 있었다. 겨울마다 깃 세운 상의에 플레어스커트·모직 코트 차림에 바닥이 매끈한 학생구두로 비탈길을 내려가야 했다. 한 손에 큼직한 가방까지 들고서. 학교 가는 길은 항상 마음이 급해서 반들반들한 빙판길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으니 여고생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연습(?)에는 노련함이 따르는 법! 3학년 겨울에는 눈길 보행 자격증을 딸 경지에 이르렀다. 눈길에선 순결한 눈에 진심을 바쳐야 한다. 넘어지기 싫다면 고개를 숙여 눈만 보고 허리를 앞으로 굽혀서 눈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잠시도 눈에게서 몸과 마음을 떼면 안 된다. 순백의 눈은 참으로 욕심이 많다. 잠시잠깐의 한눈팔기를 봐주지 않는다.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눈길에서 가장 조심할 게 딴생각이다. 다른 생각이 드는 찰나, 티 하나 없이 순결한 눈에게 집중하지 않은 벌로 보행자는 또 한 번 엉덩방아를 찧어야 한다. 어디 눈만 그렇겠는가? 관계도, 일도, 세상사 모두가 잠시 한눈팔면 망하는 게 이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영화 ‘겨울왕국2’를 보았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머리를 질끈 묶고 거칠고 찬 겨울바다를 향해 달려드는 주인공의 멋진 모습이었다. 두 번째 보다 보니 다른 면이 보였다. 1편의 이야기가 눈과 얼음의 이야기라면 2편에는 물을 등장시켰다. ‘물의 정령’인 주인공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왕국의 여왕에서 물러나 운명의 부름에 따른다. 1편에 보이는 주인공의 초능력은 두려움과 분리를 동반했다. 눈의 왕국에서 차디찬 얼음을 만드는 능력은 세상과의 단절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초능력을 받아들이는 데는 갈등과 슬픔과 고통이 따랐다. 눈과 얼음은 물이 농축되고 결집된 것이다. 순결과 정제를 뜻하기도 한다. 고결함의 정점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빙설은 세상과 거리를 둔다.

2편은 주인공의 자아정체성 찾기로 마무리 지은 1편과는 확연히 다르다. 좀 더 느긋한 시선으로 가을과 인생을 다루고 눈과 물을 관조한다. 선대왕인 할아버지 때 벌어진 빙설과도 같은 차디찬 대립과 전쟁은 아버지 대를 거쳐 주인공에게로 오면서 물 세상 이야기로 전환된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귀에만 들리던 의문의 노랫소리를 따라 거침없이 달려가던 젊은 여왕이 다다른 곳은 부계와 모계가 충돌했던 숲이었다. 그 숲에는 얼음 조각상으로 남겨진 이야기가 봉인되어 있었다. 여왕의 양친은 적대 관계였던 두 부족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사랑으로 결합했지만 얼음과 눈처럼 첨예했던 대립은 살벌한 모습으로 박제되어 숲에 가두어졌다.

젊은 여왕은 물의 정령으로 거듭나 멈춰 버린 시간과 공간을 되살려 낸다. 얼음 조각상이 되어 긴 세월을 지낸 사람들이 깨어나 한순간에 화해하면서 숲은 시간을 되찾는다. 흐르고 넘치고 소통시키는 물의 능력과 매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겨울왕국2’는 화해와 하나됨을 말한다. 거침없는 물의 속성은 누구든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녹여 내는 능력을 지녔다. 낮은 곳으로 내리꽂히는 물의 파워는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겸양의 대가이다. 어느 곳에나 거할 수 있는 물의 적응력은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며 세상을 접수한다. ‘겨울왕국2’에는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살려 낸 물의 신비가 넘실거린다.

동양의 현자 노자(老子)가 물에 반해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은 ‘이 세상에 물보다 더 만사를 잘 운영하는 것이 없다’는 뜻일 게다. 이번 겨울엔 이러한 눈의 매력이 돋보인다. 종일 펑펑 내려 세상을 눈부시게 만들어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는 곧바로 태세 전환하여 진눈깨비로, 그리고 가랑비로 변신한다. 애써 만든 눈사람의 수명이 짧아지니 아이들은 울상이지만 눈길 행보가 두려운 어른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눈 세상에서 바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으니.

물과 얼음과 눈이 빠르게 변화 교차하는 모습은 일품이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눈일 수도, 얼음일 수도 있고 비이고 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란 늘 유동적이고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까. 때로 우리는 앞길을 막는 산더미 같은 눈 앞에서 갈 길을 가늠할 수 없어 막막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냥 슬퍼할 필요는 없다. 곧이어 찾아온 겨울비가 한순간에 눈을 녹여 버리고 뒤따라 들어온 햇볕이 땅을 뽀송하게 말려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삶은 얄궂게 우리의 예상을 비껴가고 눈길은 다음 날 꽃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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