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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서울사람’이라고 한다. 19세기 비숍 여사가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꼬집기도 했지만 서울사람에게는 소위 서울부심이란 게 있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 안에 산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사대문안’에 살아야 진짜 서울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종로 권역의 삶은 특별 취급을 받았다.
최근 ‘서촌학’이라는 명칭이 등장할 정도로 종로구 서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관련 서적도 시중에 여러 권 나와 있다.
폐허 속에 일군 마을 ‘서촌’
‘서촌 그리는 마음’(정광헌 저, 이유출판)은 중의적인 제목이다. 서촌 풍경을 펜으로 그린다는 뜻도 있지만 마음으로 서촌을 그리워한다는 뜻도 있다.
정광헌의 글과 그림에서는 전문가적 화려함보다 초보자의 충실함이 느껴진다. 초등학생이 공책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연필로 눌러 쓴 것같은 열의와 성실성.
“서울의 신기한 길거리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많은 이들이 자동차 밑에 가마니를 깔고 누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차에 치여 다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자동차 고장이 잦아서 차를 길거리에 세워놓고 차 밑에 들어가 수리를 하는 것이었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아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던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와 너무나 뜨겁던 공중목욕탕의 추억은 또 어떠한가. 추억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저자인 정광헌은 1952년 전쟁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경기도 금촌을 떠나 서울 서촌으로 이사한 그는 ‘송강 정철의 집터’였던 청운국민학교를 거쳐 ‘겸재 정선의 집터’에 자리 잡은 경복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짐 실은 소달구지 지나가는 소리가 동네를 진동하고,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이 우렁차게 울렸다. 그리고 장사치들이 골목골목 외치는 소리와 흥정하는 여인들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잠시 낮잠을 자도 될 만큼 적막감이 흐르다가, 어느새 학생들이 하교하는 발걸음 소리로 다시 소란스러워지면서 동네는 어린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아침이면 멀리 앞산에서는 야호!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미들은 학교 가라고 아이들을 큰소리로 깨운다. 해거름이면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저녁 먹으라고 외치는 그런 소리들이 담 넘어 들리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던 날들이 있었다.
청와대를 지척에 둔 서촌 아이들은 격변의 현대사를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책에는 김신조 사태에 대한 기록도 등장한다.
“무언가 폭발하는 것 같은 큰 소음에 놀라 그 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 야광탄이 터지는지 북악산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였다. 이것이 소위 김신조 등 북한의 무장 공비 일당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여 벌어진 1·21사태였다.”
그의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격변의 시대, 너 나 할 것 없이 뜨거운 물에 닿듯 매 순간 놀라고 당황했던 공통의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의 ‘내가 자란 서울’
어효선 선생이 쓰고 한영수 선생이 사진을 찍은 ‘내가 자란 서울’은 1930년대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서울의 아침은 물지게 소리로 밝았다. ‘삐걱빼각 삐걱빼각 삐걱빼각 삐걱빼각’ 빨리 걸어가면 그 소리도 빠르게 이어진다. (…) 공동수도는 주인이 있어서, 한 지게 두 통에 1전을 받고 팔았다.”
“종로 큰길에는 전차가 땡땡 땡땡 종을 차며 다니고, 자동차는 어쩌다 한 대가 천천히 굴러갔다. 시내버스는 없었다. 자전거가 ‘따르릉 따르릉’ 종을 울리며 지나가고, 인력거라는 것이 택시 노릇을 했는데, 병원에 가는 환자나 탔다. 자가용 승용차는 서울 안에 열 대가 안 되었다.”
“집집마다 아침 설거지를 마칠 때쯤이면 장수들이 바뀐다. 찬거리 장수들은 들어가고 다른 장수들이 나타난다. 그릇 장수, 건어물 장수, 비단 장수, 칼 장수, 기름 장수, 소반 장수, 넝마 장수, 휴지 장수, 별의별 장수들이 물건 이름을 목청껏 외쳐 댄다.”
1930년대는 1960년대와 또 풍경이 다르다. 물지게 장수가 있었고 인력거가 있었다. 재밌는 것은 한낮의 장사치들이 골목을 누비는 것은 그때나 저 때나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30년대에도 60년대에도 골목골목 다양한 장사치들이 몰려나와 큰소리로 외치며 물건을 팔았다. 골목길 장사치는 지금의 대형마트 개념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들은 마트 못지않게 다양한 물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다만 때를 놓치면 우리 어머니들은 또 하루를 기다려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장사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때를 놓칠세라 버선발로 뛰쳐나왔을 어머니들.
세월이 흘러 2024년 서울 사대문안은 너무도 많이 변해서 그 시절 흔적을 찾으려면 시력이 아주 좋아야 한다. 차 밑으로 들어간 수리공도, 아이들 깨우는 엄마들의 목소리도, 땡땡 땡땡 달리던 전차도, 골목을 누지는 장사치도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생활의 활기는 사라지고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과 결사 항쟁을 외치는 투사들의 목소리만 남은 서울 사대문안은 오피스타운 내지 관광지로 그 생명을 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만 가득하다.
미술사가 황정수 선생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그리다 서촌 편’, 한겨레신문 김규원 기자가 펴낸 ‘오래된 서촌 오래된 서울’도 함께 읽으면 서울과 서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편 ‘내가 자란 서울’은 절판되어 책을 보려면 도서관을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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