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이때 부관이 들어와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했다. 연개소문은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당군의 본영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까지 나아갔다. 그러고는 당 태종이 보는 앞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했다. 고구려군의 용맹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의 기를 꺾자는 의도였다.
취타대의 요란한 북소리와 나팔소리에 맞춰 완전무장한 철기병이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했다. 뒤이어 도수 부대가 번쩍이는 칼과 도끼를 빼 들고 위엄있게 행진했다. 마지막으로 장창 부대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창을 곧추세우고 뒤를 따랐다.
이들이 대오를 갖추고 정렬하자 가벼운 차림의 군사 수백 명이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날렵한 동작으로 고구려 전통 무예인 수박 시범을 보였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뻗어 나오는 주먹과 발이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멀찍이서 고구려군의 열병식을 지켜보던 당나라 군사들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당 태종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태종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세적에게 말했다.
“고구려군의 위용이 실로 대단하구나.”
이세적이 겨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 군사의 수가 저들보다 배는 많습니다. 고구려군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평지에서는 우리가 더 유리합니다.”
당 태종은 맥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 태종은 장수들을 불러 대오를 정비하라 명령한 후에 고구려군 진영으로 사자를 보냈다. 그가 전한 말은 평원으로 나와 승부를 겨뤄 보자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주 이세민이 여기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뜻이 정 그렇다면 내일 아침 평원으로 나와라. 내 진정한 공포라는 게 뭔지 알려 주마!”
사자는 연개소문의 위엄에 눌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예를 갖추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태종은 사자로부터 대막리지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오히려 걱정됐다. 그러나 이제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전군에 명을 내려 내일의 결전에 대비토록 했다.
이때 연개소문도 수하 장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아군이 당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인 건 사실이다. 그러니 정면 대결보다는 머리를 써야 한다. 온영진 장군은 당군 앞에 부채꼴로 포진해 있다가 적군이 달려 나오면 각궁을 쏘며 맞서라. 그러다가 적당한 때를 보아 퇴각하면서 저들을 산골짜기로 유인하라. 누성달 장군은 계곡 초입에 숨어 있다가 대다수의 당군이 안으로 들어서면 통나무와 바위를 굴려 입구를 막아라. 고정의 장군께서는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다가 당군이 계곡에 갇히면 유황과 염초 뭉치를 던진 후 불화살을 쏘십시오.”
대막리지의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제각기 흩어져 휘하 군사들과 결전을 준비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당 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평원으로 나가 고구려군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연개소문이 3만의 철기병을 앞세우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황금 투구에 붉은 갑주를 입고 백마 위에 늠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 태종이 앞으로 나서며 꾸짖었다.
“연개소문은 들어라! 임금을 시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너의 죄를 물으러 왔다. 지금이라도 엎드려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대막리지가 가소롭다는 듯 받아쳤다.
“친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유폐한 극악무도한 패륜아가 누구 앞에서 죄를 논하느냐! 내 오늘 너에게 하늘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당장 저놈에게 천벌이 무언지 알게 해 줘라!”
명이 떨어지자 궁노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무수히 날아온 화살은 선두에 도열해 있던 당군들을 쓰러뜨렸다.
화가 난 태종이 이세적에게 명했다.
“내 저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당장 진격해서 고구려군을 몰살하고 연개소문을 잡아 오너라!”
이세적은 기다렸다는 듯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들이쳤다.
그러나 함성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날아든 화살 때문에 무수히 많은 당군이 쓰러졌다. 그래도 이세적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양군이 맞부딪치면서 피와 살점이 튀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세적은 큰 칼을 휘두르며 연개소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온영진에게 가로막혔다.
온영진은 장창을 휘둘러 이세적의 칼을 튕겨 내더니 얼굴을 향해 찔러 갔다. 이세적은 고개를 숙여 창을 피하더니 말을 몰아 상대의 옆구리를 노렸다. 온영진은 창을 세워 날아드는 칼날을 막아 낸 후에 재빨리 적장의 뒤로 돌아가서 창을 바로잡았다. 이처럼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을 때 연개소문이 퇴각을 명했다.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 퍼지자 한참 접전을 벌이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물러났다.
이세적과 싸우던 온영진은 헛손질을 하는 척하면서 몸을 빼내 후퇴하는 군사들의 뒤를 따랐다. 이에 자못 기세가 등등해진 이세적은 군사를 휘몰아쳐 고구려군을 쫓았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없애라!”
당나라 군사들은 오랜만에 펼치는 추격전에 신바람이 나서 앞뒤 가리지 않고 내달렸다.
고구려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곡으로 도망쳤다. 이세적은 승리감에 도취해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계곡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태종은 전군을 동원하여 진격하려 했다.
이때 장손무기가 헐레벌떡 달려와 말렸다.
“폐하, 저들이 저리 쉽게 퇴각하는 걸 보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합니다. 일단 기다려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잔뜩 흥분해 있던 태종은 비로소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 역시 연개소문이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장손무기의 예상대로 계곡 안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세적이 안으로 들어서 보니 고구려군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살폈지만 눈에 보이는 건 나무와 바위뿐이었다. 이세적은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급히 군사를 후퇴시키려 했다. 그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바위와 통나무가 굴러 내려오더니 계곡 입구를 막아 버렸다. 당나라 군사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산 위에서 염초더미와 불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이세적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당군 대부분은 고구려군의 무자비한 화살 세례에 목숨을 잃었다.
이세적의 부대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을 때 고구려의 철기병은 당 태종의 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열의 허리가 잘린 채 혼란에 빠져 있던 당군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고구려군을 보자 지레 겁을 먹고 흩어져 달아났다.
철기병 사이에서 뛰어나온 연개소문은 이리저리 당나라 군사를 베면서 당 태종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 뇌성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꼼짝 마라! 내 너의 목숨을 거두러 왔다!”
연개소문의 장창이 태종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한 장수가 급히 뛰어들며 연개소문을 막아섰다.
“나 설인귀(薛仁貴)가 있는 한 폐하의 몸에 있는 터럭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한갓 무명의 장수 따위가 앞을 가로막자 연개소문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장창을 번쩍 들어 설인귀를 내리쳤다. 일격에 머리를 부술 기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가 칼을 들어 창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닌가. 보통 사람이라면 그의 엄청난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흥미가 생긴 대막리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설인귀를 뜯어보았다.
이제 장년으로 보이는 데 기골이 장대하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여러 면으로 볼 때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너는 잠시 물러나 있어라.”
연개소문은 빠른 손놀림으로 창을 휘둘러 설인귀의 어깨를 찔렀다. 당장(唐將)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칼을 놓치고 말에서 떨어졌다.
연개소문은 말을 몰아 태종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구나. 네놈의 야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는지 아느냐! 네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당 태종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 위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연개소문은 분기를 발산하며 창을 높이 들었다. 태종은 정신이 혼미하여 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대막리지의 창이 날자 태종은 무의식 중에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이를 본 연개소문은 장창을 창걸이에 꽂고 말에서 내렸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을 빼서 당 태종의 목을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설인귀가 재빨리 몸으로 막아섰다. 둘이서 얽혀 싸우고 있는 사이 장손무기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여기에 고구려 군사들까지 합세하여 한바탕 아수라장이 됐다. 그사이 당나라 군사들은 태종을 구해 달아났다. 설인귀도 힘겹게 몸을 빼내어 그 뒤를 따랐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놓친 것이 분했지만 이 역시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물러났다. 당군이 패퇴하자 그는 추격을 멈추고 군사를 돌려 계곡 쪽으로 나아갔다. 기습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히기는 했지만 당군은 여전히 수가 많았기에 신중하게 대응해야 했다.
계곡에는 화살에 맞거나 바위에 부딪혀서 죽은 당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 살아 있는 당군의 비명과 절규가 천지에 진동했다.
영채로 돌아온 당 태종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그제야 이세적의 안위가 걱정됐다.
태종이 침통한 표정으로 있자 장손무기가 다가와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세적 장군은 무사할 겁니다. 소신이 찾아보겠습니다.”
장손무기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 초입에 당도해 보니 고구려의 철기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군에게 그들은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이세적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벽을 돌파해야 했다.
“저들의 수는 몇 천에 불과하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리 없다.”
군사의 독려에 힘을 얻은 당군은 함성을 지르며 고구려군에게 달려들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적군이 다시 나타나자 고구려군은 잠시 당황했다. 그 틈을 타서 당나라 군사들이 계곡 안으로 진입했다. 안을 둘러보니 처참하게 죽은 당군의 시신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시체들 사이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참으로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었다. 장손무기는 시신 사이를 오가며 이세적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수풀 속으로 들어섰을 때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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