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초면에 보자마자 꾸짖으니 원효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잠시 머물도록 해라. 조금은 깨우칠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대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원효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만났다는 생각에 감격이 밀려왔다.
대원이 원효를 위로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저렇게 하셔도 머물라고 허락하시는 걸 봐서는 스님을 내치시려는 건 아닌 듯합니다.”
원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리하여 원효는 연곡사에 머물게 됐다. 그 뒤로도 보덕 대사는 원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래도 원효는 불평 한마디 없이 기다리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덕이 제자들을 대웅전에 모아 놓고 강론을 했다.
“중생 중에 불성(佛性)을 갖추지 못한 자는 없다. 누구라도 깨우침만 있으면 바른 법을 믿지 않거나 구도심이 없어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
보덕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열성을 기울여 경청했다.
밖에서 마당을 쓸며 이를 듣던 원효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제가 듣기로 중생은 본디 불성을 지닌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다고 합니다. 불성을 갖추지 못하면 성불할 수 없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이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중 하나가 나서서 원효를 꾸짖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감히 끼어들다니, 무엄하구나!”
그는 진작부터 불청객인 원효를 눈꼴시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 보덕이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불성이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번뇌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수양을 통해 이를 걷어 낸다면 언제든 성불할 수 있다.”
원효는 보덕이 눈길이 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보덕이 강론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일렀다.
“깨달음이란 누구에게서 전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돌부리에 걸리듯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언제 오든 놓치지 않게 항상 밝은 눈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보덕은 느릿한 걸음으로 법당을 나섰다.
원효는 대사의 말을 떠올리며 고심했다. 보덕의 말대로라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곡사에 머문 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보장왕이 도교를 공인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펼치자 승려들 사이에선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리고 그 파장은 연곡사까지 밀려왔다. 승려들은 보덕 대사에게 해결책을 구했지만 그는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원효가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마침 뜻밖의 인물이 그를 찾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 원효가 산에서 나무를 해서 돌아왔는데 대원이 다가오더니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원효는 손님이란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에 붙은 검불을 털어 내고 처소로 들어서니 한 젊은 승려가 앉아 있었다.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의상(義湘)이 아닌가!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스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의상은 예전에 원효가 황복사(皇福寺)에 머물 때 교분을 쌓았던 승려였다.
의상은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총명하면서도 심성이 바르고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인 승려였다. 불교의 전통을 잇는 게 자신의 책무라 여겼기에 불법의 섭리는 명확했고, 사문(師門)을 지키는 것만을 절대선으로 여겼다.
의상의 그런 반석 같은 믿음은 원효의 출현으로 일시에 무너졌다. 그가 황복사에 나타났을 때 의상은 측근의 도반과는 다른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원효가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고 황복사에 머물면서 의상은 그와 한방을 쓰게 됐다. 둘이 함께 지내면서 의상은 원효의 박식함에 놀랐다. 그는 불교뿐 아니라 백가(百家)의 사상에 두루 통달해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렇게 뛰어난데도 항시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고치려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불전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도 나타났다. 그는 경전에 쓰인 문구도 그 의미를 꼼꼼히 살폈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는 잠자리에 누웠을 때 의상이 원효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나 자신을 찾고 있네.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을 찾는다면 이 세상의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도 알 수 있지 않겠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의상은 본인의 수련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변의 칭찬에 으쓱하여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의상의 마음속에는 현실에 대한 의심이 자리 잡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이 가을 산에 단풍이 들 듯이 순식간에 퍼졌다. 이제야 비로소 깨달음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원효가 황복사를 떠날 때 의상은 못내 아쉬워하며 산 아래까지 배웅했다.
“언젠가는 스님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 원효는 의상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헤어지는 게 서운해서 하는 소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의젓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는 그동안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수련에 정진했습니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혔습니다. 지금은 안갯속을 걷고 있는 듯합니다. 풍문을 들어 보니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천축에 다녀온 이후로 새로운 교리를 제창했다 합니다. 그 때문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당나라로 건너가 조사(祖師)들을 뵙고 가르침을 구할까 합니다. 동행하시지 않겠습니까?”
의상의 권유를 받은 원효는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 연곡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던 차였는데 불교의 역사가 오래된 당나라에 가는 건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찾고 있는 궁극의 진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네가 이처럼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원효가 흔쾌히 승낙하자 의상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나죠.”
결심했으니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원효는 하직 인사를 드리기 위해 보덕 대사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가 뵙기를 청하자 대사가 방문을 열고 물었다.
“어인 일이냐?”
“큰스님께 인사 여쭈러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려 합니다. 그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덕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올 때도 네 맘대로 왔으니 갈 때도 그냥 가면 된다.”
원효는 끝까지 냉정한 대사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중한 합장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섰다.
이때 등 뒤에서 보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잃은 것은 찾았느냐?”
원효는 보덕이 물어 준 것에 감격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내 뭐라 했느냐. 엉뚱한 곳에서 백날 찾아야 허사라 않더냐. 그렇다고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진 마라.”
대사는 이 말만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원효는 이제야 보덕의 진심을 알 수 있을 듯했다. 그의 차가운 언행은 나름대로 도반을 아끼는 방식이었다.
원효와 의상이 떠나고 나서 얼마 후 보덕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을 다 했으니 떠날 채비를 해라.”
제자들이 당황한 얼굴로 스승에게 물었다.
“갑자기 떠난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 땅에서는 불법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것 같구나.”
보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렵 고구려에서는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도교를 신봉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통에 승려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제자들 역시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제자들이 다시 묻자 보덕이 분명하게 말했다.
“백제에서 불법을 중히 여긴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자꾸나.”
스승의 명을 받은 제자들은 즉시 여장을 챙기고 떠날 채비를 했다. 본디 가진 게 없는 승려들이었기에 짐은 단출했다.
다음 날, 보덕을 필두로 승려들이 줄을 지어 절을 떠났다. 이들의 행렬은 마치 정든 고향을 떠나는 유민처럼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한편, 당나라로 가기 위해 북서쪽으로 향했던 원효와 의상은 한 달이 넘게 걸려서 요하에 이르렀다. 고구려와 당이 전쟁을 치른 직후였기에 경계가 삼엄했다. 관청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떤 공식적인 절차도 밟지 않았기에 고구려 국경 수비대에게 저지당했다. 며칠 동안 강변을 서성거리던 이들은 순찰하던 군사들의 눈에 띄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둘이 연곡사로 돌아왔을 때는 보덕과 제자들이 백제로 떠난 후였다. 원효는 허탈한 표정으로 의상을 돌아봤다.
“일단 신라로 돌아가서 앞일을 궁리해 보세나.”
의상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그의 의견을 따랐다.
두 사람은 연곡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신라로 향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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