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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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로 돌아온 의상과 원효는 잠시 그곳에 머물면서 당나라로 갈 방법을 모색했다. 며칠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육로를 포기하고 당항성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로 했다.
그들이 길을 떠난 지 보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온종일 걷느라 지친 다리로 힘겹게 언덕을 넘어서자 바람을 타고 바다의 내음이 밀려왔다.
의상은 순간 노독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기운을 되찾고 원효를 돌아봤다.
“당항성이 멀지 않은 듯합니다. 배편만 해결된다면 당나라까지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벌써 날이 저물어 가는군. 일단 이 근처에서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을 찾아보세.”
어느새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에 마음이 조급해진 의상은 주위를 둘러보며 묵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사방이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길가에는 비를 피할 나무조차 없었다. 비에 흠뻑 젖은 장삼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때 동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의상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토굴이 있습니다.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원효는 걸음을 재촉해 토굴로 다가갔다.
토굴 안으로 들어서니 퀴퀴한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온기가 있어 따스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마음을 놓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입구를 지나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서 부싯돌을 꺼내 보게나. 나는 불 붙일 만한 걸 찾아보겠네.”
의상이 바랑을 뒤지는 사이 원효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땔감을 찾았다. 이때 그의 손에 푸석한 나뭇조각이 잡혔다.
“아무리 뒤져 봐도 부싯돌이 없습니다. 어제 노숙할 때 불을 피우고 나서 빠뜨린 듯합니다.”
원효는 나뭇조각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냥 이대로 누워서 자고 가세나.”
두 승려는 토굴 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마땅히 깔 만한 풀이나 짚이 없었기에 맨바닥에 누워야 했다. 바닥이 돌투성이여서 등이 배겼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사나운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어서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의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네요.”
“같은 물이라도 하늘에서 곧장 땅으로 내리는 것과 천장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건 전혀 다르지 않나. 우리도 그곳에 가면 다른 사람이 될 걸세.”
의상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원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원효는 입막음을 하려는 듯 등을 보이면서 말했다.
“내일은 할 일이 많을 걸세. 그만 눈을 붙이게.”
의상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원효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빗소리를 듣고 있는데 문득 단아한 자태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일찍이 세상을 하직한 죽마고우 근덕이 늠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세월이 흘렀건만 그들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밝게 웃다가 슬피 울었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더니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뼈와 살점이 튀더니 그 조각들이 지난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망령으로 화했다.
한쪽 눈을 잃고 피를 흘리는 자·목이 달아나 몸통만 남은 자·창을 배에 꽂은 채 흔들거리고 있는 자·다리가 잘려 기어다니는 자들이 원효를 향해서 서서히 모여들었다. 달아나려 애썼지만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망자(亡者)들이 벌떼처럼 그의 몸을 새카맣게 덮어 갔다.
놀라서 눈을 뜬 원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살피니 망령들은 간데없고 어둠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새 비가 그쳤는지 사방이 고요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었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불가마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땀으로 흥건했다.
원효는 앉아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음이 가라앉자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그는 무의식중에 주위를 더듬거렸다. 손에 물이 담긴 그릇이 만져졌다. 그는 허겁지겁 그릇을 들고 물을 벌컥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은 달고 시원했다. 망망대해에서 몇 날을 표류하다 마시는 담천수도 이보다는 못할 듯했다.
원효는 악몽의 잔상을 떨쳐 내고 다시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원효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하얗게 질린 의상의 얼굴이 들어왔다.
원효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여기가 토굴이 아니었나 봅니다.”
입구를 통해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원효가 의아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돌벽으로 둘러쳐져 있고 바닥에는 썩어서 흐물거리는 관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맡에는 해골과 뼈가 널려 있었다.
그때서야 원효는 하룻밤을 보낸 곳이 공동 무덤으로 사용하는 토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간밤에 자신이 마신 것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던 것이다.
원효는 급히 벽을 잡고 고개를 수그린 채 토했다. 영문을 모르는 의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반을 쳐다봤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속을 게워 낸 원효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묘한 환희로 번뜩이고 있었다.
“어제는 토굴이었는데 오늘은 무덤으로 남았구나.”
구토로 몸 안에 있던 찌꺼기를 모두 게워 내고 나니 문득 어제 마셨던 물의 맛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는 차갑고 달콤하면서도 영혼의 빈자리를 채우는 듯한 충만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해골 썩은 물이란 걸 안 순간 열락(悅樂)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혐오감과 이물감만이 느껴졌다. 이는 더럽고 깨끗함의 차이가 그 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다.
갑자기 눈앞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주변이 선명해졌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애초에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의상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토굴과 무덤은 다르지 않네. 그런데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 가서 배우겠는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나라에 있을 리 없지.”
원효는 의아해 하는 의상을 뒤로하고 당나라로 가려던 발길을 금성으로 돌렸다.
금성으로 돌아온 원효는 불경의 보고(寶庫)로 알려진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며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수많은 불경을 섭렵하고 그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불경에 주석을 다는 과정에서 자신 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상념을 가지런히 모아 형태와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내면에 혼재된 생각을 바로잡았다. 이제야 비로소 생로병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갈 길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원효는 불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소승 불교를 총망라하여 1백여 종 24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깊이가 있을 뿐 아니라 쉽고도 명료하여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백제, 그리고 멀리 중국과 왜(倭)에서까지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원효는 연구와 저술에 힘을 쏟으면서 수많은 불경을 접했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을 사로잡은 경서가 있었다. 그것은 천축의 마명(馬鳴)이란 사람이 썼다고 전해지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었다. 이 책은 불교의 발원지인 천축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식파, 양대 세력의 불교 사상을 살피고 화합시키는 내용이었다.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인격을 완성할 수 있으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염오(染汚)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야 한다는 진속일여(眞俗一如)·염정불이(染淨不二)의 사상을 설파하고 있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사상이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대승기신론소 외에도 9종에 달하는 연구서를 쓰면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조금씩 자각해 갔다.
원효는 자신의 사상을 화쟁(和諍)을 통해서 펼쳐 보이려 했다. 그의 저서인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다룬 화쟁이란 서로 다른 종파 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인 일심(一心)의 큰 틀에서 보면 융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다른 저서에서도 두루 나타났다.
당나라의 현장이 천축에서 가져온 새로운 경전 때문에 초래됐던 사상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지니게 된 의문에 관해 원효는 명쾌한 해답을 던져 주었다.
원효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도성 안의 수많은 사찰에서 그를 초빙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왔다. 대부분은 왕실과 귀족의 비호를 받는 대사찰이었다. 그곳의 승려들은 세속적인 부귀영화에 집착해 명성이 드높은 사람과 친교를 맺고 싶어 했다. 하지만 원효는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장경각(藏經閣)에 틀어박혀 공부에 매진할 뿐이었다. 이에 그들은 원효를 괘씸하게 여기고 앙심을 품었다.
이 무렵 자장(慈藏) 국사가 원녕사(元寧寺) 증축 현장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분황사에 들렀다. 그는 원효라는 학승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보고 싶어 온 것이었다.
분황사의 주지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뛰어나와 자장 일행을 맞이했다. 자장은 진덕여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불교계의 거물이자 도를 깨우친 고승이었다. 그런 인물이 왕림했으니 사찰이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자장은 주지를 위시한 승려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 원효에 관해 물었다.
“원효는 장경각에 있을 겁니다.”
주지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역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원효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자장은 일행을 거느리고 장경각으로 향했다. 원효는 주지의 말대로 장경각에서 두문불출하며 불경을 연구하고 있었다.
자장이 따르는 사람들을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목판과 서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사이로 책상에 앉아 서책을 뒤적이는 원효의 모습이 보였다.
국사가 등 뒤에 다가섰지만 서책에 몰두한 원효는 알아채지 못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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