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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의료 파국으로 직전까지 치달았던 의정 갈등이 수습되지도 않은 채 이번엔 성분명 처방이 의·약 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겉으론 의약품 수급 안정과 국민 선택권 확대를 내세우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다른 권력 이동의 조짐이 읽힌다. 물론 의약품 수급 불안정이라는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분명 처방 전체 조건을 약사에게 넘긴다면 의사에서 약사로 의약품에 대한 영향력이 다른 축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명 처방을 놓지 않는 쪽은 분명 이득이 있다. 가지고 싶은 쪽은 이윤 구조가 상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가 그렇다. 성분명 처방은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25년 전부터 풀지 못한 숙제다.
간단하게 말해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약의 제품명이 아닌 주성분명으로 처방전을 작성하는 제도다. 가령 ‘타이레놀500mg’ 대신 ‘아세트아미노펜 500mg’으로 기재한다. 처방권을 쥔 의사는 성분만 명시하고 약사는 동일 성분의 여러 제네릭 중 하나를 선택해 조제한다.
원론적으로 보았을 때 국민에게 합리적인 선택권 보장과 경제적 부담 경감이라는 국민 중심 보건의료 서비스가 맞다. 성분만 같으면 조금 싼 제네릭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가 어떤 제품이 제네릭 중에서도 저렴한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의료시장 구조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성분명 처방이 도입되면 ‘어떤 제품을 선택하느냐’의 권한이 의사에서 약사로 넘어간다. 이는 곧 제약사의 영업 대상이 의사에서 약국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특히 체인 약국, 창고형 약국 시대를 맞는 현시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큰 파급력을 가진다. 이미 온누리·메디팜 등 주요 약국 체인들은 자체 PB 제품을 내놓거나 특정 제약사와 협업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성분명 처방이 제도화되면 이들은 사실상 ‘조제 시장의 유통 허브’가 된다. 어느 제네릭을 환자에게 조제하느냐에 따라 막대한 매출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약국은 ‘조제 권한’을 넘어 ‘시장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약사 사회는 “수급 불안 해소와 환자 선택권 확대”를 강조한다. 하지만 품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낮은 약가, 원료 공급 불안, 생산 설비 축소 등 복합적인 구조 문제다. 성분명 처방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오히려 제네릭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국내 현실에서 약국마다 재고 사정이나 이익률에 따라 특정 회사 제품이 편중될 수 있다. 이는 의약품의 품질 신뢰도와 환자 안전성 문제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정부와 국회는 ‘환자 중심의 합리적 제도 개선’이라 설명하지만, 이 제도가 가져올 시장의 재편 방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부족하다. 의약분업 제도의 근간을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인데도 보건복지부는 단순히 '온라인 통보 방식 개선' 수준으로 접근한다. 실제로는 약국과 제약사 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시장경제 구조가 자리하고 있음에도 이를 제도 설계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의사들은 성분명 처방을 ‘처방권 침해’로 본다. 약사가 약을 바꾸는 순간, 처방의 책임이 모호해지고 의료 결과의 일관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엔 자신들의 권한이 약화할 것이라는 불안도 있다.
반면 약사들은 “약 선택권이 의사에서 약사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환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환자가 실제로 약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 조제 결정은 여전히 전문가인 약사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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