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약품의 글로벌 도전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1989년 스위스 로슈에 항생제 제조기술을 수출한 뒤 37년간 기술수출과 신약 허가, 제품수출을 차례로 경험한 한미가 올해 일라이 릴리와 로슈그룹 제넨텍에 잇달아 신약 후보물질을 이전했다. 두 계약의 최대 규모는 약 5조원에 달한다.
대형 계약이 잇따랐다는 사실 보다 눈여겨볼 대목은 한미가 연구개발(R&D) 역량에 글로벌 사업개발(BD)과 투자 경험을 더해, 연구실 안에 머물던 후보물질을 외부 파트너와 연결하고 실제 시장 진입까지 염두에 둔 사업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재교 한미사이언스 부회장(대표이사)은 그 과정에서 R&D와 시장을 잇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미의 해외 사업은 1989년 자체 개발한 세프트리악손 제조방법을 로슈에 600만달러 규모로 기술수출하며 첫 발를 내 딛었다. 국내 제약사가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한 첫 사례다.
이후 1997년에는 마이크로에멀전 제제기술을 노바티스에 7300만달러 규모로 판매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제약업계 최대 규모 기술수출이었다. 제조기술에서 제제기술로, 이후 개량신약과 혁신신약으로 이어지는 한미의 R&D 전략이 구체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이 국내 개량신약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다. 2015년에는 사노피와 얀센 등에 신약 후보물질을 잇달아 기술수출하며 국내 제약업계에 ‘한미 신드롬’을 일으켰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 진출은 계약 체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후보물질은 임상시험과 허가, 상업화라는 긴 과정을 거쳐야 하고, 단계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한미 역시 일부 기술수출 자산의 권리 반환과 개발 중단을 경험했다. 계약 규모와 실제 신약 성공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체험하는 기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암신약 포지오티닙이다. 한미가 개발해 미국 스펙트럼 파마슈티컬스에 기술이전한 포지오티닙은 HER2 엑손20 삽입 변이가 있는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로 FDA 허가를 추진했다.
그러나 2022년 9월 FDA 항암제자문위원회(ODAC)는 포지오티닙의 치료 혜택이 위험성보다 큰지를 묻는 표결에서 9대4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같은 해 11월 FDA는 현재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승인할 수 없다며 보완요구서한(CRL)을 발송했다. 추가 임상시험을 통한 유효성과 안전성 자료 확보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스펙트럼은 포지오티닙의 개발 우선순위를 낮추고 연구개발 인력을 줄였다. 미국 허가를 눈앞에 뒀던 한미의 항암신약 도전이 사실상 중단된 순간이다. 특히나 제품의 높은 상업화 가능성에도 불구 임상설계 용량과 승인신청 용량의 차이 등 개발단계에서 오류가 시장출시의 장애가 된 사례여서 아쉬움이 큰 사례로 평가됐다.
반면 같은 해 한미는 미국에서 다른 성과로 아쉬움을 만회했다. 한미가 개발한 지속형 호중구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는 ‘롤베돈’이라는 제품명으로 2022년 9월 FDA 허가를 받았다. 같은 시기 포지오티닙의 좌절을 보상받기에 충분한 성과였다.
롤베돈 역시 허과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FDA는 2021년 제조 관련 문제를 이유로 CRL을 발송했다. 스펙트럼과 한미는 지적 사항을 보완해 재신청했고 이듬해 승인을 받아냈다. FDA의 보완 요구를 넘어서 실제 제품 출시까지 이어진 사례다.
포지오티닙과 롤베돈의 엇갈린 결과는 한미에 과제를 남겼다. 후보물질을 발굴해 글로벌 제약사에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자산을 어느 단계까지 자체 개발할지, 언제 파트너를 찾을지, 파트너가 임상·허가·판매를 수행할 역량을 갖췄는지까지 거래 구조에 반영해야 한다.
한미의 글로벌화는 기술수출과 신약 허가에만 머물지 않았다. 자체 개발·생산한 제품을 글로벌 제약사의 판매망에 올리는 제품수출도 일찍부터 추진했다.
대표적인 품목이 아모잘탄이다. 한미는 2009년 MSD와 고혈압 복합신약 아모잘탄의 해외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한미가 제품을 개발·생산하고 MSD(현재 분사한 오가논)가 ‘코자XQ’라는 브랜드로 세계 50여개국에 공급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완제의약품을 글로벌 제약사가 도입해 해외에서 판매하는 모델을 성립했다.
2017년에는 이상지질혈증 복합신약 로수젯의 해외 23개국 수출 계약도 MSD(현재 오가논)와 맺었다. 연구개발과 생산은 한미가 담당하고 글로벌제약사가 현지 허가와 마케팅·판매를 맡는 구조다.
제품수출은 기술수출과 수익 구조가 다르다. 기술수출이 계약금과 개발·허가·상업화 단계별 마일스톤에 의존한다면 제품수출은 실제 판매를 통해 반복적인 매출을 만든다. 자체 제품에서 발생한 현금을 다시 혁신신약 R&D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로수젯은 국내 처방시장에서 성장한 뒤 해외로 영역을 넓히며 한미의 제품수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한미는 기술수출과 FDA 허가, 제품수출을 모두 경험했다. 지난해 김재교 부회장이 합류하면서는 이들 경험을 바탕으로 R&D 자산을 시장과 연결하는 사업개발 기능이 한층 부각됐다.
김 부회장은 2025년 3월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1990년 유한양행에 입사해 기획·IR·전략기획·글로벌전략·약품사업 등을 거쳤고, 이후 메리츠증권 IND본부장 부사장으로 제약·바이오 투자와 사업개발을 담당했다.
유한양행 재직 당시에는 폐암신약 레이저티닙의 글로벌 기술수출을 비롯해 신약의 사업화 과정에 관여했다. 제약사 내부에서 후보물질을 글로벌 파트너와 연결한 경험과 증권가에서 투자자의 관점으로 바이오기업과 신약의 가치를 평가한 경험을 함께 갖춘 인물이다.
한미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면서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사업개발 기능도 강화했다. 김 부회장은 이노베이션본부장을 겸직하며 그룹 차원의 오픈이노베이션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직접 챙겼다.
한미약품 R&D 조직이 후보물질의 과학적 가능성을 검증한다면 이노베이션본부는 시장성, 적응증 확장 가능성, 글로벌 제약사의 전략적 수요를 함께 살펴 사업화 가능성을 검토한다. 외부 기술을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 자산을 외부 파트너와 연결하는 양방향 오픈이노베이션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에 따른 성과는 취임 1년여 만에 나타났다.
한미약품은 올해 6월 일라이 릴리에 지속형 GLP-2 유사체 소네페글루타이드의 한국을 제외한 글로벌 권리를 이전했다. 계약금 7500만달러와 개발·허가·상업화 마일스톤 최대 11억8500만달러를 포함해 총 계약 규모는 최대 12억6000만달러, 약 1조8973억원이다.
8월24일에는 제넨텍과 비만·대사질환 신약 HM17321의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총 계약 규모는 최대 23억500만달러, 약 3조1892억원이며 선급금은 1억9000만달러, 약 2629억원이다. 두 계약의 최대 규모를 합치면 5조원을 넘어선다.
소네페글루타이드는 단장증후군 치료제로 글로벌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며, HM17321은 기존 인크레틴 계열과 다른 CRF2 수용체를 선택적으로 활성화하는 UCN2 유사체로 미국 임상 1상 단계다.
특히 HM17321는 아직 임상 1상 단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1억9000만달러의 계약금은 글로벌 비만신약 라이선스 거래에서도 상당한 수준이다. 초기임상 단계치고 총계약금액에 8%에 해당하는 계약금은 동급최초에 대한 기대와 체지방 감소와 근육 보존·증가 가능성이 높게 평가됐다는게 시장을 분석이다.
제약업계는 서로 다른 두 후보물질이 한 해에 릴리와 제넨텍이라는 글로벌 빅파마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한미의 파이프라인과 R&D 역량 전반이 다시 평가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김 부회장 체제에서 눈에 띄게 커진 계약 규모는 한미가 37년간 축적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새로운 사업으로 연결하고, 이를 반복 가능한 성장 구조로 만드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로슈에 제조기술을 수출한 경험, 2010년대 대형 신약 기술수출, 포지오티닙의 FDA 좌절, 롤베돈의 허가와 미국 출시, 아모잘탄과 로수젯의 제품수출은 각각 다른 형태의 글로벌화였다. 앞으로는 이 경험을 따로 쌓아두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글로벌사업 체계로 연결하는 틀도 자리를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체 제품의 수익을 R&D에 재투자하고, 유망 후보물질은 글로벌 파트너와 공동개발하며, 상업성이 확인된 제품은 해외 판매로 확장하는 선순환 구조다. 외부 유망 기술을 선별해 도입하는 오픈이노베이션까지 더해지면 한미의 사업개발 영역은 기술수출을 넘어 투자·공동개발·제품수출로 넓어질 수 있다.
릴리와 제넨텍 계약은 김 부회장 체제의 첫 성적표다. 김 부회장이 R&D와 시장, 투자와 사업개발을 연결해 한미의 글로벌 도전을 일회성 기술수출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로 바꿔낼 수 있을지가 다음 승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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