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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할아버지의 시계①
“안녕하세요. 올해 81살 송병수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지나 해방 기쁨 맛봐…나 자신 자랑스럽게 생각해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7-31 00:28:31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안녕하세요. 나는 올해 81살인 송병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얘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순간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소박한 나의 삶 속에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하나는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했던 내 일생을 옛날이야기 하듯이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 일생을 글로 풀고자 합니다.
 
나는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부모님이 사시던 곳은 강서구 발산동인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그곳에 물이 다 찼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여기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으로 이사해서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이지요.
 
내 또래 사람들이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8·15해방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느끼는 독립의 기쁨을 절절히 느낄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6학년이 됐을 때 겪은 6·25 전쟁은 정말 힘들고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우리 집은 내가 5살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우리 삼남매를 키우느라 경제적으로도 몹시 힘들었기 때문에 그 고통이 훨씬 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는 좀 더 잘 살든지 못 살든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3년 동안 전쟁을 치러내느라 다 같이 힘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마치 영화나 게임 속의 놀이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전쟁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지요.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의 고통은 갔지만, 아버지 없이 삼 남매를 키우시는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보다 2살 더 많으셨던 어머니는 천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31살에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 지금 같으면 재혼하시라고 말씀드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당시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고 천식까지 앓으시며 세 자식 뒷바라지하시느라 고생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몹시 아프고 슬픕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할머니께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많이 채워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께서 나를 이끌어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삼촌 막냇삼촌께서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연이은 자식의 죽음에 할머니의 상심은 말할 수 없이 크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려고 우리 삼 남매를 엄격하게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책을 좋아하셨던 것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우리 할머니는 참 많은 책을 읽으셨습니다. 책을 좋아하시는 할머니 덕분에 우리 삼 남매도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게 됐고, 책을 읽는 습관은 내가 학교 졸업장은 없어도 많은 공부를 독학할 수 있게 만든 바탕이 됐지요.
 
우리 할머니는 엄하기로도 유명한 분이신데 “일찍 들어오너라” 말씀하셨는데 10시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작대기를 들고 나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시기도 하셨니다. 그렇게 엄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 보니 우리는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들로 자라게 됐습니다. 인사 잘하고 예절 잘 지키고 동네에서 모범 청년 하면 저 송병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셨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엄하고도 따뜻한 보살핌 덕에 우리 삼 남매는 반듯하게 잘 자랐습니다.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 때문에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누님과 동생이 있지만, 장남인 저는 가정을 돌봐야 했습니다. 집에 있는 소를 돌보기도 하고 밭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스스로 공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 제사 축문은 삼촌이 쓰셨는데 언제까지 삼촌에게 부탁할 수 없어 나 스스로 옥편을 펴다 놓고 획수를 찾아가며 독학으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방의회 전문교육과정과 경기대 범죄예방학과도 수료했습니다.
 
지금도 19명의 초등 동창들을 만납니다. 우리 동창들은 하나의 잡음도 없이 지금까지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중·고등·대학교까지 졸업한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그 친구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구의원 2번, 농협 이사 12년, 경로당 회장단도 7년째 맡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어릴 적 나의 성향이나 성격이 어떤지 파악할 순 없었지만 나 자신의 힘으로 한문, 영어 등의 과목을 독학한 것을 보면 뭐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내와 23살에 결혼했습니다. 군대 마지막 휴가 중 동네 어르신들의 이끌림에 얼떨결에 선을 보게 됐고 바로 결혼하게 됐습니다. 그때 당시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른들이 정해 준 대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 역시 아내와의 맞선 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런 아내와 결혼 후 1남 4녀를 낳았습니다.
 
인제 와서 그동안 함께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니 남들처럼 내가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지금도 나를 많이 챙겨주고 위합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나를 보며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 두고 먼저 죽으려다가도 당신이 음식 때문에 며느리한테 구박받을까 봐 그렇게 못하겠어...”
 
누군가는 먼저 갈 텐데 그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 그 빈자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부부는 서로의 좋은 점만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베푸는 것, 그리고 참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절대 남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입니다. 1남 4녀의 자녀들에게도 항상 얘기해줍니다. 또 남한테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것을 신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자녀들 모두 나의 바람대로 잘 자라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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