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명나라 사대가 반도사관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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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조선왕조 사대부 사대모화주의로 반도사관 등장
단군조선 역사서 허구의 기자조선 탄생계기 제공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1-11-11 09:10:14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에 맞서다가 아버지 영조 임금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간 사도세자의 묘지문은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地(유명조선국 사도세자 묘지)”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숭정기원 후 133년 임오 7월)”이라는 문구로 끝난다.

서두에 국적을 썼는데 국명 조선(朝鮮) 앞에 유명(有明)이라는 접두어가 붙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유명조선을 단군·기자·위만조선처럼 ‘명나라 시대에 존재했던 조선 즉 이성계의 조선왕조를 말하는 것이라는 학자도 있으나 마지막 문구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에 의해 그런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숭정(崇禎)이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다. 농민반란을 일으켜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칭한 이자성(李自成)의 군대가 1644년에 자금성을 향해 쳐들어오자 숭정제가 목을 매 자결함으로써 276년간 이어온 명나라 사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1644년은 숭정 17년으로 이후 중국에서는 숭정이라는 연호가 쓰이지 않았지만 명나라를 지극으로 사대했던 소중화 조선에서는 계속 사용됐다. 당시는 청나라가 상국이었기에 조정의 공식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사용했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崇禎後’ 연호와 함께 ‘有明朝鮮’이란 국명을 사용했다.

사도세자 묘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1762년에 작성됐으니 정상적이었다면 당연히 ‘건륭(乾隆) 27년’이라는 청나라 연호가 사용돼야 했다. 그러나 당시 영조 임금의 조선왕실 조차 비공식적으로 ‘숭정후 133년’이라는 조선에만 있는 특이한 명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 명나라가 하사한 국호 조선은 기자조선을 본받으라는 뜻이었다. [사진=필자 제공]

서오능에 있는 장희빈의 묘지석도 유명조선으로 시작된다.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이장된 묘지석에도 유명조선이 맨 앞에 새겨져있다. 이렇듯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비에는 사자의 관직·성명 앞에 ‘유명조선’이 관용구처럼 붙어있다.

유명조선의 의미는 ‘명나라의 조선’, ‘명나라에 속한’, ‘명나라에 있는’ 등으로 해석된다. 이는 조선이 소중화로 명나라에 종속됐음을 나타내는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에게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죽어서도 뼈 속까지 명나라를 지극정성으로 사모했던 소중화 조선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장장 오백년 넘게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에게 하사받은 국호 조선은 우리 조상인 단군조선이 아니라 주 무왕이 봉했다는 바로 은나라 출신이 세웠다는 기자조선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 삼봉 정도전이 지은 아래 <조선경국전>에 국호 조선이 정해진 글귀가 있다.

“해동은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과 기자와 위만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해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했다. (중략) 그러나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候)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명 태조)께서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했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처럼 천자께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중략)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을 설명하고 그 뜻을 부연해 8조의 가르침을 지어서 나라 안에서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배움과 8조의 가르침이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이처럼 없어져버린 명나라를 향한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사대모화주의는 반도사관 정착의 계기로 작용했다. 반도사관 정착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좁혀졌다. 그 결과 역년 2000년이 넘는 단군조선은 두 동강이 났으며, 두 동강난 2000년의 절반은 허구의 기자조선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전문가 칼럼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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