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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디 순한 가을 햇살을 맞으러 거실에 앉았는데 머리 위로 휙 하고 그림자들이 지나간다. 새들이 소리도 없이 날아가나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군단이다. 나뭇잎들이 가을 바람에 우수수 떼를 지어 떨어지는 광경이다. 올해는 단풍 드는 모습을 유심히 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여 관심을 놓은 까닭이다. 하지만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나의 지인들은 그렇지 않다. 전국 곳곳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빼어난 풍광들을 올려 준다. 사진 속에 그분들은 없지만 촬영할 당시 가을에 만취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미소를 짓는다.
가을은 왜 우리를 이렇게 설레게 할까? 한동안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가을 나뭇잎은 은퇴하는 영웅의 모습이라고. 초봄부터 영차영차 세상으로 나와 뜨거운 여름 속에서 쉼 없이 일한 잎들의 당당한 은퇴식이라고. 조금 지나고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나무에서 떨어져 땅을 구르는 잎들은 이제야 넓은 세상을 즐기며 진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건너편 나무의 잎들과 긴 세월 눈만 맞추고 지내다가 때가 되어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재잘거리는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잎의 입장에서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가을은 자신의 본심을 보여주는 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엽록소에 가려져 내보이지 못한 노랗고 빨간 색소들이 드러나는 때가 가을이다. 숨겨져 있던 이면을 공개하는 셈이다.
그런데 올해는 단풍을 보는 관점이 싹 달라졌다. 잎이 아닌 엄마나무의 입장이 되었다. 봄에 꽃을 피우고 싹을 내면서 시작된 나무의 한살이는 가을에 열매와 씨앗을 완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때가 되면 나무는 모든 욕심을 거둔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열매를 스스로 베어내고 잎도 떨군다. 한 해의 면류관인 그들을 자신이 소유하지 않는다. 야무지고 야멸차게 끊어낸다. 햇살과 바람과 땅의 기운이 엄마나무를 도와준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엄마나무는 순차적으로 자식들과 이별한다.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나무의 별리(別離)를 보며 탄성을 내며 즐긴다.
우리는 왜 가을 나무를 보며 행복해할까? 그것은 변화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변화는 또한 다음 단계로 이끄는 성장이다. 푸른 잎들이 색깔을 바꾸고, 꽃이 진 곳에서 열매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식물들의 변화는 우리를 설레게 하고 살아있음을 일깨운다. 그들은 가을에 접어들 때까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솟구치는 힘으로 우리를 응원했다. 살아내라고, 임무를 완수하라고, 힘들어도 헤쳐 나가라고. 봄과 여름 산에서 그리고 숲에서 우리는 그들의 약진을 냄새 맡고 듣고 보아왔다. 청년 같은 그들을.
가을부터 우리는 식물의 중년을 본다. 중년의 생명력을 배운다.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나무가 갈무리하고 걷어내고 변신하고 가벼워지는 기술을 훔쳐본다. 자식을 잘 키워 독립시키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여 정리하는 힘을 본다. 이 또한 생명력이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지혜이다. 다시금 봄이 되면 자식은 자식을 낳을 것이고 내가 마무리 해둔 일은 누군가가 계속 이어갈 것이다.
모든 것을 끊어낸 나무는 겨울 동안 여유롭게 세상을 누릴 참이다. 결코 외롭지 않다. 새들, 작은 동물들, 곤충들이 찾아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렇다. 다음 생을 위한 장엄한 이별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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