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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부리며 ‘세상 불쌍한’ 척해도
더 이상은 동정하지 않는 게 이치
이젠 편협‧규탄과 내로남불 대신
이해하고 대화하며 머리 맞대길
1970~1980년대에 텔레비전을 본 분이라면 일본 SF시리즈 ‘울트라맨’을 알 것이다. 우주방위군 소속 ‘하야타’ 대원이 울트라맨으로 변신해 지구를 침략하는 우주 괴물들을 물리치는 얘기다. 당연히 울트라맨은 매번 승리하며 지구는 안전해진다.
절대무기 ‘스페시움’
그런데 울트라맨을 보면서 필자를 포함해 많은 20세기 어린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우주방위군 하야타 대원은 울트라맨으로 변신한 뒤 3분이 지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3분 안에 서둘러 괴물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니 시간이 넉넉치 못한 하야타는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절대무기’인 스페시움(Spacium) 이란 광선무기를 사용하는 게 좋다. 초반에 절대무기를 쓰면 단번에 괴물을 박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야타 대원은 괴물한테 얻어맞고, 엎어치기 당하는 등 사서 고생고생하다가 3분 막판에야 그 멋진 스페시움을 사용한단 말인가.
나이가 조금 들면서 ‘방송사가 방영시간 채우기 위해 일부러 시간 끌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년시절 가졌던 의문은 환갑이 지난 올해에야 풀렸다. 일본하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인 오타쿠, 즉 ‘덕후’가 쓴 글을 보고서야 정답을 알았다.
오타쿠가 알려준 울트라맨의 진실
그 덕후는 일본 ‘공상과학연구소’ 주임연구원 야나기다(柳田)란 사람이다. 그는 명문 도쿄대학에 들어갔으나 뜻한 바 있어 대학을 중퇴하고 학원 강사 하다가 1996년 애니메이션과 SF영화에 관한 책 ‘공상과학독본’을 출간해 60만부나 팔아치운다. 이를 계기로 아예 ‘공상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매년 전국 학생들로부터 1만건 넘는 질문이 들어오며 지금까지 그가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인지’ 검증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옛날얘기가 1000건 이상이다. 요즘엔 명문 메이지(明治)대학 겸임강사도 하고 있다. 그가 울트라맨을 분석해 필자의 50년된 의문인 ‘왜 처음부터 절대무기 스페시움을 사용하지 않을까’를 풀어줬다.
이 덕후는 울트라맨 ‘시즌 1’을 철저히 분석했다. 덕후에 따르면 괴물은 38종 등장하며 울트라맨은 이 중 26종에만 스페시움을 사용했다. 또 시리즈 초반에 등장하는 12종의 괴물에 대해선 보자마자 스페시움을 발사했다. 울트라맨도 처음에는 스페시움만 쏘면 괴물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광선무기를 남발했다. 하지만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스페시움 사용 시간이 늦어지고 사용 빈도도 줄어든다. 광선이 아니라 당수나 날라차기로 죽인 적도 있고, 우주방위군 도움을 받아 해치우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허다한 절대무기들
왜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스페시움을 안 쐈을까. 덕후 야나기다가 과학적으로 내린 결론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쏜다고 다 죽는 게 아니어서’ 안 쐈던 것이다. 광선을 쏜 26건 중 괴물이 죽은 건 12건에 그쳤다. 괴물이 안 죽으니 날라차기 하고 엎어치기 하며 몸으로 싸웠던 것이다. 스페시움 치사율은 46%에 불과했다. 환갑 넘어 알게 된 진실은 “스페시움 광선은 절대무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좀 오버일지 모르지만, 또 하나 깨달은 사실은 울트라맨은 ‘심오한 철학 SF’라는 점이다. 모든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광선이 없듯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이론도, 절대로 들어맞는 진리나 이념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적개심 규탄 통계가 살상 무기로
그런데 요즘은 울트라맨 못 본 사람이 많아서 인지, 세상에는 아직도 스페시움 같은 절대무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조국 전 법무장관은 딸의 대학 입학이 취소되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제 만족하시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탄압받는 양심’ ‘세상 불쌍한’ 이란 개념의 코스프레며, 그런 코스프레에 스페시움급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군을 결집시키고 여론을 장악할 수 있는 엄청난 무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규탄’이란 이름의 스페시움도 있다. ‘규탄하는 정의’를 쏴 대며 다른 사람의 정의를 부정하려 한다. 조국 지지자들은 “규탄한다 김건희, 두고보자 김건희”하며 규탄한다. 하지만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적의 모든 것을 규탄해서야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규탄한다고 적이 척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적개심 스페시움, 복수 스페시움도 있다. 자신들의 과거는 잊은 채 상대를 그저 척결하려 한다. 세상을 적과 동지로 갈라버리려 한다.
사회가 과학적이 된 뒤 등장한 강력한 스페시움급 절대무기는 ‘통계’다. 애매한 통계와 숫자로 접근해서는 “그러니까 너는 틀렸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통계라는 것은 숫자를 통해 실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짜내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를 부정하고 공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의들을 인정하길
다시 말하지만 통계는 공격용 절대무기가 아니다. 세상을 개혁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도구다. 예를 들어 “이 통계 좀 보세요. 남성이 엉망인 거 맞죠?”라는 식으로 무기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남성은 이 항목에서 여성보다 낮은 경향이 있는데 왜 그럴까요? 이걸 고쳐보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치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며 대화해서 해결 방안을 찾으라고 통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광선무기가 없다.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사회도 사라지려 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만만찮은 두 세력이 세상을 양분하고 있음도 드러났다. 그러니 이제 죽이려 들기보다 머리를 맞대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무기가 절대무기가 아님을 알았다면, 또 상대가 결코 소수가 아님을 알게 됐다면 비타협과 규탄을 넘어서야 한다. 진보파만의 정의가 아니라 세상 모든 정의를 존중하는 ‘대화의 문화’로 들어가야 한다. 인터넷에서 상대에게 ‘댓글 돌’을 던진다고 사회가 자기 쪽으로 오지 않으며,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자기진영에만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적을 규탄으로, 적개심으로, ‘세상 불쌍한’ 코스프레로, 통계로, 성으로 제압하고 배척하면 자기 세상이 온다고 여전히 믿는 울트라맨들. 그러나 울트라맨은 우주에서 온 괴물은 무찔러도 지구온난화와 경제난을 해결하진 못한다. 스페시움으론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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