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농업고등학교에 가라고 말했다. 남들은 의대를 보내려고 조기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학과 영어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농촌에 인구가 부족해서 농업이 유망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대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는 과연 누굴까?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53) 교수였다.
조영태 교수가 쓴 책 정해진 미래(2016년)는 화제를 모았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교수가 된 아버지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인구학자였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특징인 한국사회를 연구하더니 미리 정해진 미래에서 나만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구 변화를 예측해서 희소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혜안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만물의 영장은 정해진 미래를 모른 채 살아간다.
학창 시절 서울대 물리학과는 최고로 손꼽혔다. 예비고사 전국 수석인 임지순(69학번)과 오세정(70학번)을 비롯해서 역대 수능 첫 만점의 주인공 오승은(99학번)도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법대와 의대를 선택한 수재도 있지만 과학자를 꿈꾸는 물리학도와 전자공학도가 많았다. 탄소나노튜브 연구로 세계적 석학이 된 임지순 교수처럼 이공계 인재들은 한국 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이해진과 김정주는 각각 한국 최고 인공지능(AI) 회사(네이버)와 세계적인 게임 회사(넥슨)를 창업했다.
하지만 과학자와 창업을 꿈꾸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요즘 최상위권 고교생은 의사를 꿈꾼다. 서울대에 입학했던 지인 딸은 재수하더니 지방대 의대에 들어갔다. 서울대 공대 입학 정원은 850명인데 해마다 자퇴하는 1학년이 100명을 넘어섰다. 서울대 공대 김영오 학장은 “대부분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로 가기 위해서다”고 설명했다. 월급쟁이 과학자보다 고소득 자영업자(의사)가 좋다는 뜻이다. 의대쏠림과 인재유출은 과학기술계가 당면한 문제다.
한국이 의사 천국이라면 중국은 과학자 천국이다. 중국은 과거 한국을 닮았다. 수재들은 물리학과를 비롯한 이공계를 선택한다. 의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학생보다 과학자로 창업해서 재벌이 되겠다는 학생이 많다. 중국은 해외 인재를 부르는 천인계획(2008년)과 국내 인재를 양성하는 만인계획(2012년)을 거쳐 외국 고급인재까지 흡수하는 치밍(啓明) 프로그램(2019년)으로 과학기술 선진국이 됐다. 양자물리학과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분야에서 한국을 넘어선 지 오래됐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를 뚫고 로봇과 바이오, 항공우주, 반도체 등 10대 전략 산업을 육성했다.
한국 물리학회장을 지낸 이영백 교수는 2018년 정년 문제로 고민했다. 메타물질 분야 석학이었지만 한양대에 요청한 정년(65세) 연장은 거절당했다. 후배에게 돌아갈 일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 고민도 됐다. 한국 사회는 정년 연장을 놓고 찬반으로 나뉘어 다투지만 중국 사회는 65세 이상 고급 인재라면 외국인도 데려간다. 이영백 교수는 2019년 중국 푸단대 석좌교수가 됐다. 한국에 누가 될까봐 걱정했다던 이영백 교수에게 푸단대는 차관급 최고 과학자(원사)처럼 대우했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는 해마다 세계 연구기관 순위를 매긴다. 중국과학원(CAS)은 하버드대를 제치고 세계 최고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영백 교수가 근무하는 푸단대는 11위로 서울대(61위)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78위)을 크게 앞질렀다. 세계 최고라던 미국 하버드대(2위)와 유럽 최고로 손꼽히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10위)를 빼면 중국과학기술대학교(3위)부터 저장대(4위)와 베이징대(5위)를 거쳐서 중국과학원대(6위)와 칭화대(7위), 상해교통대(8위), 난징대(9대)까지 죄다 중국 연구기관이다.
중국은 세계 최고급 대학과 이공계 인재를 가졌다. 과거와 달리 한국에서 배우거나 미국에서 인재를 데려갈 필요가 없다. 한때 우리는 중국산(made in china)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도 한국산(made in korea)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드론 제조사 제로제로로보틱스 왕멍추는 말했다. “이제는 중국에서 발명(invented in china)하는 시대다.” 예전엔 미국이 먼저 만들면 중국이 싸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젠 드론과 자율주행처럼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창조한다.
총성 없는 경제 전쟁 시대다. 좋은 의사가 많은 한국이 좋은 기술자가 넘치는 과학자 천국 중국을 이길 수 있을까? 인구 변화처럼 수험생의 선택을 보면 정해진 미래가 보인다. 쓸데없는 정치 싸움보다 미래를 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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