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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 축구는 2002년 한일월드컵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때 처음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민 이후 무려 32년의 세월이 지난 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아시아 대표로 출전할 수 있었다. 이후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는 월드컵의 단골손님이었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5번 출전해 4무10패의 치욕적인 성적표였다.
대한민국 축구의 르네상스는 누가 뭐래도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조별리그 1위에 이어 16강, 8강의 파죽지세를 거듭하며 역대 최고 성적인 4강에 진출해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자긍심을 심어줬다. 당초 16강 진출이 목표였지만 그 이상을 뛰어넘어 4강 진출을 해 오죽하면 ‘4강 신화’라고 칭송하겠는가.
월드컵 이후 태극전사들은 축구의 본고장인 잉글랜드(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해외 진출의 봇물을 이뤘고, 국내에서 뛰더라도 최고 대우를 받았다. 인천광역시, 경남도 등 지방 자치단체들은 축구의 선풍적인 인기를 앞세워 시도민 구단을 앞다퉈 창단했다.
월드컵 전사 모두 현역서 은퇴
그로부터 1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23명의 월드컵 전사는 모두 현역에서 물러났다. 제2의 인생을 위해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크게 지도자와 행정가, 방송으로 나뉘는 가운데 지도자가 대세를 이룬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월드컵 전사 3명이 얼마 전 K리그에 몸을 담았다. 2002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이영표, 박지성이 그들이다. 홍명보는 원래 수비수이지만 득점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에도 가담하는 등 포지션을 국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라운드를 누빈다는 뜻에서 리베로라고 붙여졌다.
그 중에서도 홍명보의 현장 복귀는 가장 뜨거운 이슈라고 할 만하다. 축구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기에 늘 관심의 대상이다.
수비수이던 홍명보는 고려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0년부터 22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경기(A매치)에 무려 136경기에나 출전했다. 월드컵에는 네 번이나 연속해서 참가했고, 이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최고 스타였던 홍명보가 지도자로 변신한 건 2005년 9월이다. 애당초 그의 은퇴 후 진로는 행정가였다.
행정가에서 지도자로 항로 바꿔
그의 축구인생 항로가 바뀐 것은 2006년 독일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사령탑에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네덜란드)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축구 사정에 밝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수석코치로 활약했던 핌 베어벡(네덜란드)이 적극 추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홍명보의 코치 선임은 일대 사건이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인증하는 코칭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전이어서 무자격, 특혜 논란이 일었지만 뜨거운 관심 속에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홍명보는 지도자로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2007년 아시안컵 수석코치, 2008년 베이징올림픽 수석코치를 지냈다. 감독으로서의 첫 걸음은 20세 이하(U-20) 대표팀이었다. 정점을 찍은 건 2012년 런던올림픽이다. 23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3, 4위전에서 숙적 일본을 누르고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홍명보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최고봉인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성난 팬들로부터 엿 세례
다만 눈앞에 다가온 2014년 브라질월드컵은 아니라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을 치른 최강희 감독의 사퇴로 대표팀 사령탑이 공석이 된 가운데 홍명보는 “한국 축구가 어렵다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며 축구협회의 감독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월드컵 본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대표팀을 맡다보니 준비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무2패의 참담한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대표팀은 성난 팬들로부터 엿 세례를 받기도 했다.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선수로서 4회 연속 월드컵 출전과 2002년 월드컵 4강 주역, 그리고 A매치 최다 기록을 남겼고, 감독으로서도 올림픽 동메달의 영광을 안았지만 결과적으로 브라질월드컵은 ‘독이 든 성배’였다.
여론의 비난 속에 힘든 시기를 견뎌낸 그는 2016년 중국 무대를 통해 처음으로 클럽팀 감독에 데뷔했다. 하지만 항저우 뤼청에서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구단의 변변치 못한 투자와 빡빡한 재정 탓으로 인해 뤼청은 그만 2부 리그로 떨어졌고, 홍명보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축구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건 행정가로의 변신이었다. 2017년 11월 축구협회 전무이사로 발탁됐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그의 풍부한 경험을 높이 샀다. 홍명보는 축구협회 전무로 재직하면서 각급 대표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9년 U-20 월드컵 준우승, 2020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우승 등 굵직한 대회에서 성과를 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인생 항로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지난해 말 프로축구 울산현대 사령탑에 올라 감독으로서 명예회복에 나섰다. K리그 감독은 처음이다. 2005년 우승 이후 정상 문턱에서 번번이 무너졌던 울산은 홍명보 감독에게 운명을 맡겼다.
스타의식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해야
더구나 전임 김도훈 감독은 K리그 정상을 밟지는 못했지만 아시아 챔피언스리그(ACL) 최정상을 차지했기에 홍명보 감독으로서도 부담감이 적지 않을 터다. 감독 홍명보가 넘어야할 첫 시험대는 4일부터 카타르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이다. 울산은 아시아 대표 자격으로 출전한다.
행정가로서 3년간 현장을 떠나 있었던 홍명보가 어떤 지도력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더구나 울산은 K리그에서 많은 투자를 해 왔기에 선수단 구성 또한 훌륭한 편이다. 선수 1인당 평균 연봉이 무려 3억6000만원에 이른다. 카리스마 넘치는 홍명보 감독은 과거의 스타의식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한다는 자세로 일관해야 할 것이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감독이 지도자로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되새겨 볼 일이다.
과거의 영광도, 실패도 모두 지난 일이다. 이제 감독 홍명보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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