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700년 백제는 멸망한다. 이후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중심이 돼 수복운동을 전개하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 더구나 수복군내 내분이 일어 복신이 도침을 죽이며 와해조짐까지 보인다. 그러던 와중이던 661년 9월 야마토에 볼모로 가있던 부여풍(豐)이 귀국하면서 수복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부여풍은 30대 무왕의 적자(사택왕후 소생)이다. 631년 의자왕(선화공주 소생)과의 권력투쟁에 패해 야마토로 망명한 후 30년 만에 돌아와 신왕에 즉위한다.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
풍왕은 수복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현 전북 부안 우금산성)을 도성으로 삼아 백제를 재건한다. 이후 당의 웅진도독부를 포위하는 등 영토 수복에 자신감을 얻은 풍왕은 662년 12월 산성인 주류성(周留城)에서 평지성인 피성(避城)으로 도성을 옮긴다.
「일본서기」〈천지기〉에 풍왕이 천도를 결심하며 피성을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피성은 서북쪽에 고련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남동쪽으로는 심니기언(深泥巨堰)이 막고 있어 방어하기에 좋다. 또한 사방에 논이 있어 도랑이 파여 있고 비가 잘 내린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이 삼한 중에 기름진 곳이다(避城者 西北帶 以古連旦涇之水 東南據深泥巨堰之防 繚以周田 決渠降雨 華實之毛 卽三韓之上腴焉).’
피성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성산(城山)을 포함한 주변일대로 추정된다. 「김제읍지(金堤邑誌)」에는 ‘성의 길이는 2820척, 높이 20척, 옹성이 4개, 샘이 6개가 있었으며 고종 때 이르러 완전히 허물어져 증축하지 못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당시 풍왕을 호종해온 야마토 장수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에치노 타쿠츠)이 ‘굶는 것은 나중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다(夫飢者後也 亡者先也)’며 피성 천도를 극구 반대하지만 풍왕의 의지를 꺽진 못한다.
그렇다면 풍왕은 무슨 이유로 피성으로 천도한 것일까? 풍왕은 수복운동의 성공을 자신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풍왕에게는 수복군 말고도 귀국할 때 호종해온 야마토지원군 5000여명이 따로 있다. 특히 전북 김제 일대는 만경평야를 포함한 한반도의 최대 곡창지대이다. 안정적인 식량공급이 가능해 풍왕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유혹이었다. 풍왕은 나당을 모두 몰아낸 후 새로운 도성 피성에서 펼칠 자신만의 신백제를 꿈꿨다.
단명한 재건수도 피성
그러나 아쉽게도 풍왕의 피성은 3개월간의 단명으로 끝난다. 해가 바뀌어 663년 2월 풍왕은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한다. 신라가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풍왕과 수복군을 전방위에서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이때 거물성(전북 남원), 사평성(전남 순천), 덕안성(충남 논산) 등이 순차적으로 신라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피성은 3개월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에 성립된 또 하나의 백제 도성이다. 백제의 부활을 꿈꾼 풍왕의 의지와 소망이 잠들어 있는 아쉬움의 장소라 할 수 있다.
피성은 미완으로 끝난 재건백제의 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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