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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4일 오전, 논산~천안간 고속도로에서 104중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연도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마침 사고 현장의 차들 중 하나를 운전했기 때문이다. 차들은 그날 짙은 안개와 블랙 아이스라 일컫는 결빙 현상 때문에 속도를 내다 말다 하면서 달렸다. 언론에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는 차들이 속도를 내다 말다 하면서 달린 실제적 이유다. 그날 그 지역 고속도로 사정은 2~3미터 시야도 허용하지 않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면서 시야가 말끔이 트이는 현상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반복학습이 진행 중이었다.
104대의 차량이 집중적으로 추돌 사고가 난 구간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달리던 차량 사이로 순식간에 1미터 앞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쓰윽 들어오다보니 순간적으로 안개에 휩싸인 차들이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초저속 상태가 된 것이다. 초저속 상태의 차들은 뒷차 입장에서는 안개 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격이었다. 그 뒤를 쾌청한 도로를 달려오던 차들이 브레이크를 밟으려는 순간,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런 상황은 상하행선 전 차선에 걸쳐서 약속한 듯이 벌어졌다. 헤드라이트나 비상 라이트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날 그 안개를 아마 먼 곳에서 바라본다면 마치 불가항력의 거대한 괴물이 고속도로를 어슬렁거리는 광경이지 않았을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면 104대의 차들이 일렬로 추돌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짙은 안개 구간에서 내 차는 홀연히 나타난 앞 차의 꽁무니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멈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백미러를 보았다. 그때였다. 짙은 안개 속으로 차 한 대가 유령처럼 우리 차를 향해 다가왔다. ‘어, 저런!’ 뒷차는 블랙 아이스에 걸린 것인지 순간적으로 가속이 붙었다. 내가 외쳤다. “다들 몸에서 힘 빼세요! 뒷 차가...” 나는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 순간, 꽈르릉 소리와 함께 뒷 트렁크가 열리면서 지축을 뒤엎는 듯한 충격이 등판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탄 차는 앞 차의 뒷 범퍼를 때렸다. 내 목이 앞으로 꺾였다가 뒤로 흔들렸다.
삼십여 분이 지나 경찰 복장과 보험회사 직원, 119 구조대원들이 보였다. 그날 우리 차에는 모두 네 명이 타고 있었다. 일행은 사고로 인한 공포감에 짓눌린 때문인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끔 신음만 내뱉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차 문을 당겼다. 차 문은 끼드등, 하는 쇳소리를 내면서 덜렁거렸다. 조사원이 바인더에 볼펜을 세우면서 물었다. 그는 동승자들의 기색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다치신 분은 성함과 전화번호 좀 부탁드립니다.” 모두들 그에게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
이완의 맛을 즐기는 방법
그날 나는 사고자 이름에 명단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차는 폐차장으로 견인됐고, 다른 분들은 모두 병원부터 가야할 상황이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탄 후송 차량 속에서 사고 상황을 천천히 복기 했다. 충돌의 순간에 내가 취한 행동을 단언하면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이완’이었다. 굳이 더 나열한다면, ‘내맡김’ ‘받아들임’ ‘비움’ 같은 표현도 가능할 것 같다. 운전대에서 손을 내리고, 순간적으로 내 몸 전체의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긴장을 완전히 풀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완’이라는 추상적 표현의 실질적 행위를 한 셈이었다.
90년대, 2천년 대, 2천십년 대... 긴 세월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받아들임’ ‘내맡김’ ‘비움’ 등의 표현이 지금 시대에 가까이 올수록 익숙한 언어가 돼 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대로 가면 어딘가 무너지거나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래도 조금씩 긍정적인 쪽으로 가는 기미를 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어휘 속에서 발견한다. ‘치유’ ‘수용’ ‘공감’ ‘성찰’과 같은 어휘가 알게 모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완’은 위 따옴표 속에 있는 어휘들의 실질적 공통 분모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긍정적 느낌과 자연스러움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다. ‘명상’ 혹은 ‘알아차림’ ‘마음챙김’이라는 표현 속에 스며 있는 ‘이완’은 몸과 마음의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리듬감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언어의 생기를 드러낸다. ‘이완’이라는 추상명사의 실제적 현상은 사람간의 관계나 대화, 스포츠, 사랑, 심지어는 육체적 투쟁 속에서도 작동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마음이나 태도, 표정, 자세 따위로 드러나기도 하고, 유연한 사고, 판단, 제안 등의 표현으로도 드러난다.
‘이완 체험’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가능하다. 당신이 지금 자신의 몸을 의식하고, 그 몸의 무겁거나 단단한 부위를 알아차린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바로 ‘이완’ 현상이 일어난다. 당신의 마음이 몸의 어느 부위든 간에 주의 깊게 닿기만 해도 마치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게 된 울던 아이처럼 편안해진다. 백 밀러를 통해 본 뒷 차의 돌진에 모든 저항이나 심신의 긴장을 포기하는 그 순간에도 이완은 작동한다.
이완은 유사 명상이다. 혹시 ‘명상’이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면, 있는 그 자리에서 가볍게 눈을 감아본다. 당신은 지금 눈을 감은 순간과 졸음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상태에서 30초 정도만 지나도 당신은 몸과 마음의 현저한 변화를 경험한다. 현저한 변화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상태 즉, 쾌적한 기분과 지극한 평화감이다. 허버트 벤슨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완된 몸에서 나오는 뇌파를 소위, 알파파(α)라고 한다. 알파파는 초당 8~12 정도의 주파수로서, 일반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주파수다. 알파파 상태는 기분좋음, 상쾌함, 평화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완감을 유도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2월 이맘 때 나는 ‘이완’을 통해서 몸을 보호했다. 이 표현을 ‘받아들임’ ‘내맡김’ ‘비움’ 같은 표현으로 바꾼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그날 나는 이완이라는 몸의 선택지를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불가항력의 그 사태를 피하려 하거나 화들짝 놀라면서 운전대를 굳세게 붙들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내 팔은 어딘가 단단히 어긋났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그 순간 오히려 몸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이완의 맛을 즐겼기 때문이 아닐까. 1분도 좋고 2분도 좋았다.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내 몸 감각을 하나씩 찾아보는 즐거움을 나는 조금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눈을 감고 내 몸 감각을 살펴보면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부드럽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어린애 같아서, 그만 온 영혼이 나른해진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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