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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일산의 ‘공갤러리’에서 열린 서양화가 조원강의 개인전에 들렀다가 작가도 만날 수 있었다. 거의 30년 전인, 91년도 미술대전에서 서양화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후 거의 근황을 몰랐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환상적인 전시작품들로 눈호강을 한 터여서 많은 기쁨의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조심스러워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30년 전의 논란에 관한 것이다. 그가 표절 논란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마음은 있으면서도 기회가 없어서 옹호를 해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미술저작권 기관 심의에 여러 차례 참여한 바 있어, 이 문제를 한 번쯤은 거론하고 싶었던 터이다.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어떤 누드사진의 텍스트를 자신의 그림에 참고했음을 밝힌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포즈는 비슷하지만 그것이 사진 텍스트임을 강조하기 위해 프레데릭 아쉬도 원작 사진에는 없는 색분해표도 그려 넣었고, 몽환적인 회화적 표현과 기하적인 구성을 결합시킨 것이다. 데생에 능한 조 작가는 인체를 그리려 했다면 다른 포즈로도 얼마든지 잘 그려낼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드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이중 객체의 표현을 위해 포즈 그대로 그려 넣었고, 또한 그것의 정체는 인체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서나 기호들을 삽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단은 찬반으로 양분됐다. 저작권 심의 현장에서는 이런 경우 표절로 판정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인용이라는 것은 오늘의 예술에서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연구에서의 인용과 다를 게 없는 차원을 표절이라 치부하는 것은 당시 우리 문화가 어딘가 모르게 신경질적이고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작가는 이로 인해 심한 내상을 입었다. 오늘의 문화현상의 신호탄을 과감히 쏘아 올리면서 정작 본인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는 94년 뉴욕으로 떠났다. 기분전환도 필요했고, 이참에 평소부터 경험하고 있었던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더 깊은 공부도 하고 싶었다. 뉴욕에서 다시 학부부터 다니면서 활동을 병행했다. 워낙 재능이 많은 작가이기에 뉴욕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17년 동안 체류를 하게 됐다. 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뉴욕에서 마음껏 공부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갔던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인용’이라는 방법론을 더욱 탄탄하게 다지고 더 깊이 있는 조형의 활로를 열어나갔다.
미국에서의 초기 관계성을 주제로 하여 유화, 드로잉 등의 다양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풍경들을 포착하여 그 가운데 내포된 여러 가지 의미의 사슬들을 추출해내는 작품들을 많이 하게 된다. 포착된 반려동물의 표정과 행위 그 자체가 항상 환경과 주인 등에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읽어내는 묘미가 쏠쏠하다. 이후 작가는 흥미롭게도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이라는 주제 아래 ‘인용’이라는 포스트모던 방법론을 더욱 극적이고 기발하게 심화시켜가고 있다.
뉴욕의 유명 미술관 전시 현장에서 보는 행위의 주체들이 흥미롭게 설정돼 있다. 어떤 시선을 띤 인용된 전시작품이 있으면, 그것을 관람하는 관람자들의 다양한 시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텍스트의 인용 방식의 연장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맥락이 달라지기도 한다.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표정과 시선은 거창한 극적 구성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 조지 시걸 작품을 연상케 하는 조각상 같은 것이 실제 전시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관객처럼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작가와 독자, 화가와 모델 등의 정체가 우리의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전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전도 가능성은 곧 세계의 상대성, 예술 본질의 상대성까지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 역시 보는 행위에 참여하며 매개역 혹은 은닉된 모델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길거리의 모자 행상과 구경꾼 및 보행자들을 그린 작품의 경우 그 무리들 안에 작가가 참여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보이는 사람이면서도 보는 사람이다.
작가는 근래 3D 펜으로 드로잉한 작업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이전에도 재현에 충실한 화면 속에 감각적 선묘를 혼재시키는 작업을 여러 차례 선보인 적이 있다. 일루전 자체가 가치는 고유의 근대적 질서를 무력화시키면서도, 또 다른 가상의 개연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ON-OFF가 가능한 유령 같은 가상들에 의해 잠식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등장하곤 했던 드로잉이 이제 3차원의 선을 생산해내는 펜으로 3차원의 드로잉을 창출해내고 있다. 거대한 벽을 연출하면서 공간 해석을 역동적으로 수행하는 작가의 드로잉이 참으로 기발하다. 선적인 움직임만이 아니라 어떤 텍스추어까지도 구현 가능할 정도로 진화한 드로잉 작업은 작가의 영상 텍스트까지 결합되면서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보다 극적으로 고조시킨다.
데생의 토대가 탄탄한 작가의 독창적인 표현의 세계를 최근에야 접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 같기도 하다. 우리 화단에서 상처를 받고 떠난 후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낸 사이 고독하게 쌓아온 조형의 금자탑을 이제라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늦었지만 작가의 진지한 예술혼과 성취에 경의의 갈채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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