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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직후 반성과 쇄신 분위기 강했으나
/광우병 집회 이후 손 편한 잔기술로 일관
/이번에도 지난 5년 치부 감추려고 안간힘
/평생 야당 할 생각 아니라면 몸을 낮출 때
요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신구(新舊) 정권의 줄다리기를 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2007년 말 노무현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던 시절의 일이다.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은 대선 패배 직후 “우리는 폐족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폐족(廢族)’이란 말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이다. 다산은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며 다독였다.
안희정의 글도 이명박 후보에게 531만표의 대차(大差)로 정권을 내준 대선 결과를 놓고 새로운 대안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항변하기 전에 동의와 합의를 통해 힘을 모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실컷 울 여유가 없습니다.” 깊은 나락에 빠졌다는 절망감과,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당시 좌파 진영에는 분명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이명박 당선인과 노무현 대통령의 2008년 2월18일 청와대 만남이다. 이명박의 대통령 취임을 일주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이명박 측은 한미 쇠고기 협상을 남은 임기 중에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하러 찾아갔으나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하는 소회만 장시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명박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노 대통령은 우회적으로 거절의 뜻을 밝힌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는 그때의 심경이 기록돼 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찾아갔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쳐 타결을 약속한 일이었다. 그 일을 마무리 짓지 않은 채 퇴임하겠다니, 넘겨받은 이 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가슴이 답답했다.’
만약 그때 좌파 진영이 안희정의 다짐처럼 치열한 자기반성과 쇄신을 통해 ‘유능한 진보’로 거듭났더라면, 노무현이 흔쾌히 한미 쇠고기협상을 마무리 짓고 청와대를 떠났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상상해본다. 한국 정치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새로 선출된 더불어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가 “반드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 상임고문을 지켜내겠다”고 밝혔다. 대선에서 국민 선택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인사치레로라도 고개를 수그릴 법한데 그럴 낌새는 없다. 오로지 문재인·이재명을 ‘보위’하는 게 최대 목표임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유난히 감사원에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하고, 검찰을 상대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의 완전한 박탈)을 외치는 일도 정권교체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민감한 소재인 김정숙 여사의 의전 비용도 무조건 감추려 한다. 대선 내내 친여언론들이 그토록 자신들에게 일편단심이었는데도 성에 안 차는지 ‘언론 개혁’을 다시 들고 나왔다. 종편 TV도 손보겠다고 한다. 자신들을 비판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으름장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지난 5년간 저질러 놓은 치부들을 어떻게든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안간힘이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 지금보다 더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깔려 있다. 극적인 전환이 없는 한 이들에게 반성과 대안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된다.
좌파 진영에서 어느 새 상식과 염치가 실종돼 버린 배경의 원류는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안희정의 ‘폐족’론처럼 이명박 당선 이후 ‘좌파의 재구성’에 고심하던 이들은 2008년 봄 광우병 집회라는 뜻밖의 사태를 만나면서 손쉬운 탈출구를 찾아냈다. 이명박 정권이 판단 착오로 인해 자초한 위기이긴 했지만 정권 초기의 국정 동력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반면 이들에게는 선전선동의 위력에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회고록에는 ‘씁쓸했다’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 갑작스러웠던 좌파 진영의 집권과 이른바 ‘적폐 청산’을 내세운 복수혈전, 다시 정권을 빼앗기게 되면 고스란히 되갚음을 당할까봐 올인한 ‘편 가르기’와 ‘내편 박아놓기’ 등 끝없는 악순환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현 정치 상황의 출발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물론 노무현-이명박 교체기와, 이번 문재인-윤석열 교체기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착각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게 있다. 박근혜 탄핵이 있었던 2017년 대선, 선거 바로 전날에 트럼프-김정은 싱가포르 회담이 벌어졌던 2018년 지방선거, 코로나 사태 속에서 치러진 2020년 총선이 그들의 온전한 실력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광우병 집회 이후에 자신들의 최대 약점인 무능함을 메우려 하지 않고, 포퓰리즘과 잔기술로 일관해왔다. ‘무상 시리즈’ ‘편 가르기’ ‘적폐 청산’의 3종 세트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름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절대 반지’로 여겨졌던 이 전략들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무상 시리즈는 자신들에게 독박을 씌우는 것임을 2030들에게 간파 당했고, 편 가르기는 ‘네 편’으로 내몰린 나머지를 똘똘 결집시켰다. 적폐 청산을 ‘청산’이라고 쓰고 ‘보복’이라고 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이들은 거저 손에 쥔 권력의 단맛에 흠뻑 취했고, 끝 모를 폭주 정치는 나라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이라도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좌파의 실패를 국민에게 확인시켜 보여줌으로써 ‘노무현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이 전부터 나왔다. 몸을 낮춰야 할 때 낮추는 순리를 택하지 않고 국회의원 172석으로 억지로 물길을 돌려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떠나는 모습이라도 유권자들에게 아름답게 비쳐져야 한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언론중재법에 반대하는 국민의 힘을 향해 “평생 야당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민주당이야말로 지금부터 평생 야당만 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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