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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숨 가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여 기의 무사가 앞서 달리고 불과 한 마장쯤 거리를 두고 수백 기의 추격병이 뒤쫓았다. 누런 흙먼지가 뒤를 따랐다. 말발굽 소리가 황량한 벌판에 울려퍼졌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쫓기던 무리 앞에 송화강의 지류 엄체수(奄遞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가에 다다른 말들이 앞발로 땅을 차고 거친 투레질을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추격병이 등 뒤에 있어 되돌아갈 수도,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해 동북 벌판을 거침없이 달려온 강물은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모르는지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말에 탄 무사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매서웠다.
그들이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왕자님, 어찌하오리까?”
우렁찬 목소리의 무사가 멀리 보이는 추격병을 힐끗 보며 물었다. 여차하면 달려가 결전을 벌일 기세였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이었다.
주몽은 손잡이가 옥으로 된 채찍을 거머쥐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하늘이시여, 앞은 엄체수가 가로막고, 뒤에는 동부여 대소의 무리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굽어살피소서!”
채찍을 들어 허공을 휘젓자 구름 낀 하늘에서 한 줄기 햇살이 비치더니 수십의 천신(天神)이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추격병이 탄 말의 다리를 갈대로 옭아맸다. 말이 고꾸라지면서 병사들도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주몽이 다시 채찍을 들어 강물을 내리쳤다.
“하백이시여, 당신의 외손을 구하소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10척은 됨직한 거북 십수 마리와 5자가 넘는 초어(草漁)와 잉어 수천 마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몽이 먼저 말을 몰아 거북의 등에 올라탔다. 순간 초어와 잉어들이 몰려들어 거북의 몸을 받치고 강 건너편으로 헤엄쳤다. 오이·마리·협보 등 무사도 뒤를 따랐다.
이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추격병 중 하나가 말을 버리고 강가로 달려왔다.
“주몽 왕자님, 왕명입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내 부여를 떠날 때 부왕께서 언질을 주셨다. 공연히 헛수고하지 말고 돌아가라.”
주몽은 상대의 얄팍한 속셈에 넘어가지 않았다.
주몽 일행은 유유히 강을 건넜다. 추격병들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늘과 하백의 도움을 받아 강을 무사히 건넌 주몽 일행은 큰 나무 밑에 앉아 잠시 땀을 식혔다.
오이가 한쪽에서 마구를 정비하다가 주몽에게 물었다.
“왕자님, 이제 어디로 갑니까?”
“남쪽으로 간다. 여기서 오백 리쯤 가면 졸본(卒本·중국 요령성 환인 지역)이라는 곳이 나온다. 그곳이 우리가 터를 잡을 땅이다.”
주몽이 흙을 털고 일어섰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봉우리가 이들을 축복하듯이 성스러운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여는 북만주 일대를 주름잡는 강국이었다. 수세기 전에 등장해 차츰 세력을 키웠고, 해부루 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에서 넘보지 못할 정도로 번성했다. 나라의 융성을 이끈 해부루왕이 해내지 못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일이었다.
늙도록 자식이 없자 해부루는 신령이 깃든 산천을 찾아다니며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성을 드리면 백이면 백 임신한다는 곤연(鯤淵)의 소문을 들었다. 해부루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의 행차가 연못에 이르렀을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왕을 태운 말이 연못가에 자리한 바위 앞에 멈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해부루는 이를 이상히 여기고 시종을 시켜 바위를 치우게 했다. 넓은 구덩이가 드러났는데 그 안에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시종은 구덩이에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눈이 툭 튀어나오고 입이 큰 것이 영락없는 개구리 형상이었다.
해부루는 아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하늘이 내려 준 아이다.”
그 자리에서 하늘에 제를 올린 후 왕은 아이를 데리고 궁성으로 돌아왔다.
해부루는 아이가 금개구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애지중지 키웠다. 아이는 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총명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해부루는 그를 태자로 삼고 정사에 참여시켰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재상 아란불이 왕에게 독대를 청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얼굴이 어두운가? 변방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해부루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재상이 입을 열었다.
“소신이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천제께서 나타나 이르시기를 ‘장차 내 아들이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희는 떠나라’ 하셨습니다.”
해부루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가 일군 땅을 두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곳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와 멀지 않은 곳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부루는 할 수 없이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로 바꿨다.
얼마 후, 이들이 떠난 자리에 해모수가 한 무리를 이끌고 와서 나라를 세웠다. 이를 북부여라 했다.
해모수는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주변 세력을 규합했다. 북부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해부루가 나라를 옮김으로써 둘 사이의 싸움을 피한 것이다. 만일 천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면 나라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천도한 지 몇 년 후, 해부루가 죽고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왕은 현명하고 어진 임금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가 즉위한 이후로 동부여는 선왕 대를 능가하는 번영을 누렸다.
어느 날, 금와는 정무에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사냥을 했다. 이때, 인근에 사는 어부가 그물에 걸린 여인을 왕에게 바쳤다.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말을 못 했다.
금와가 살펴보니 여인의 입술에 가느다랗고 긴 바늘이 꽂혀 있었다. 왕은 시종을 시켜 조심스럽게 바늘을 빼게 했다.
“너는 누군데 이리 험한 꼴을 당했느냐?”
“소녀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함께 물가에 산책을 나왔다가 해모수의 눈에 띄어 웅심산 아래 압록가로 끌려갔었습니다.”
“북부여의 해모수를 말하는 것이냐?”
금와가 놀라서 재차 확인했다.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실로 기이했다.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는 지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물가에 나왔다가 유화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는 유화를 압록에 있는 자신의 구리 궁궐로 끌고 갔다. 산해진미와 주옥을 선물하면서 그녀의 사랑을 구했다. 겁을 먹은 유화는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해모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딸이 해모수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하백은 분기가 탱천하여 곧장 해모수의 궁으로 쳐들어갔다. 앞을 막아서는 장정들을 때려눕히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 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바깥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해모수가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하백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놀란 해모수가 몸을 피해 궁 밖으로 달아났다. 둘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면 해모수가 수달이 되어서 쫓았다. 사슴이 되면 승냥이가 되어 덮치고, 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면 매로 변해서 따라갔다. 이런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둘은 꼼짝도 못 할 정도로 지쳐 버렸다. 마침내 하백은 해모수를 사위로 인정하고 수궁으로 데려가 유화와 혼인시키기로 했다.
하백은 해모수가 자기 딸을 버릴까 걱정해서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하백은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고 해모수에게 한껏 술을 권했다. 그가 술에 대취하자 딸과 함께 가죽 부대에 넣어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 오룡거에 실어 하늘로 올려 보냈다.
오룡거가 미처 수궁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깨어난 해모수는 자신과 유화가 가죽 부대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놀란 해모수는 유화의 황금 비녀로 가죽을 찢고 홀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은 몹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놓친 고기였다. 화풀이는 자연 유화에게 돌아갔다. 수궁의 명예를 더럽힌 죄를 물어 긴 바늘로 입술을 꿰어 말을 못 하게 한 후 강에 내다 버린 것이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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