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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동쪽 끝자락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타하루가 깜빡 졸다가 눈을 뜨자 막사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새 고구려 군사들이 말갈 진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고구려 장군 무골이 공격에 앞서 항복을 권유했다. 만리하치는 결정해야 했다.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것인가, 굴욕을 참고 항복할 것인가. 말갈 추장은 운명의 갈림길에서 사는 쪽을 선택했다. 자기 목숨은 마음대로 던질 수 있지만,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의 목숨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만리하치는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말갈 전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타하루도 이런 상황에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골은 투항한 자들을 고구려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주몽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말갈은 고구려와 같이 조선의 자손이오. 서로 오해가 있어 싸우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길 바라오.”
주몽의 환대에 감격한 만리하치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주몽은 타하루에게도 관대했다.
“옛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대가 북옥저를 등졌다 해서 고구려의 신하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죄를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지위까지 회복시켜 주었다. 이에 감복한 타하루는 고구려의 신하 되길 자청했다.
주몽은 말갈 추장들과 함께 소와 양을 잡아 동맹 의식을 치렀다. 양의 피를 입술에 바르고 하늘을 향해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말갈족을 든든한 우방으로 둘 수 있게 되었다.
주몽이 말갈을 평정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나라 안팎으로 평안하던 어느 날, 동부여에서 유화부인의 별세 소식이 날아왔다. 부인의 장례는 태후(太后)의 예로 치러졌다고 했다.
주몽은 사신을 보내 금와왕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졸본 땅에 어머니의 신묘(神廟)를 세웠다.
또 몇 해가 흘렀다. 따듯한 봄날, 주몽이 편전에 들어가려는데 시종이 다가와 아뢰었다. 동부여에서 청년 하나가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기 아들인 유리(類利)였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만삭이었던 예 씨 부인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옥동자를 분만했다. 부인은 아이의 이름을 유리라 짓고, 엄격히 훈육했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인지 유리도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고, 말을 익숙하게 다루었다. 말을 달리면서 날린 화살이 빗나가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동부여의 넓은 벌판과 험준한 산악을 휘젓고 다니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그 모습이 아버지인 주몽의 모습을 빼닮았다.
하루는 유리가 길가에서 장난을 치다가 이웃 아낙이 이고 가던 물동이를 향해 화살을 쏘아 깨뜨렸다.
화가 잔뜩 난 여자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아비가 없으니 뭘 배웠겠어.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충격을 받은 유리는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도대체 제 아버지는 누구죠?”
예 씨는 비로소 아비의 신분을 말해 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너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왕이시다. 그분은 본디 이곳 동부여의 왕자셨는데 형제들의 시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져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 그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유리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고구려라면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이곳을 떠날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일곱 모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부러진 칼 조각을 숨겨 놓았다고. 네가 장성하면 그것을 갖고 당신을 찾아오라 하셨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유리는 그 뒤로 몸가짐을 바로 하고 무술과 학문에 매진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가 숨겨 놓은 신표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누비고 다녔다.
어느덧 몇 년이 흘렀지만 유리는 아직 신표를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말한 단서가 너무 모호했기 때문이다. 이날도 산을 헤매다가 돌아온 유리는 툇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다. 멍하니 기둥에 기대앉아 있다가 신을 벗으려 고개를 숙였는데, 신기하게도 주춧돌의 모서리가 일곱인 게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어 위에 놓인 기둥을 보니 재질이 소나무였다.
유리는 나무 기둥 밑에 손가락을 넣어 봤다.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유리는 고개를 숙여 주춧돌과 기둥 사이의 틈을 살폈다. 과연 쇳조각이 있었다. 손가락을 넣었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가는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후벼 파냈다. 영락없는 부러진 단검의 조각이었다. 드디어 아버지의 신표를 발견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부러진 칼 조각은 녹 하나 슬지 않고 번쩍였다. 유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예 씨는 아들이 가져온 신표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부인은 나직하게 일렀다.
“당분간은 누구도 이를 알아서는 안 된다. 대소 태자가 여전히 우리를 감시하고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마침 열흘 후에 국왕의 생신 잔치가 열릴 것이니 며칠 동안은 경계가 소홀해질 게다. 그때 기회를 봐서 성을 빠져나가자. 나는 미리 궁에 가서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람을 가겠다고 슬쩍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비밀리에 떠날 준비를 해 두었다.
마침내 금와왕의 생일이 됐다. 궁중 사람들은 잔치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유리는 예 씨 부인을 모시고 일찌감치 궁으로 들어가서 국왕에게 축수하고 사은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어머니를 수레에 태우고, 절친한 친구인 옥지·구추·도조와 함께 성문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알현을 허락받은 유리가 편전으로 들어섰다. 긴장되긴 했지만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옥좌에 앉은 왕이 보였다. 상상했던 대로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유리는 품에서 칼 조각을 꺼내 왕에게 바쳤다. 주몽도 허리춤에 끼고 있던 부러진 단검을 꺼냈다. 두 조각을 맞춰 보니 딱 맞아떨어졌다. 틀림없는 주몽의 신표였다.
“분명 나의 아들이구나. 이리 훌륭히 자란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하구나.”
옥좌에서 일어난 왕은 유리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부자의 정을 대변했다. 유리도 감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벅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어머니는 어찌 지내느냐?”
아들을 만나니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부인 생각이 절로 났다.
“저와 함께 오셨습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주몽은 시종을 시켜 예 씨를 데려오게 했다.
잠시 후, 부인이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나타났다. 세월이 많이 흘러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생겼지만 여전히 고운 자태였다.
주몽과 예씨는 서로 부둥켜안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보던 유리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이·마리·협보 등도 함께 어울려 기쁨을 나눴다.
주몽은 궁성 전체가 들썩일 만큼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가족의 상봉을 축하하고 지난 노고를 위로하면서 즐겁게 먹고 마셨다. 마치 젊은 날의 동부여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였다.
그날 밤, 주몽은 참으로 오랜만에 예 씨와 동침했다. 둘은 침상에 나란히 누웠다. 지난날의 뜨거웠던 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리가 헤어진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구려. 그간 고생 많았소. 이제 예전 일은 모두 잊고 행복하게 삽시다.”
“이 몸은 이제껏 유리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전 소첩과 헤어지면서 한 약조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예 씨 부인은 유리를 태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켰다. 소서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주몽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내가 어찌 그 약속을 잊을 수 있겠소. 내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주몽은 큰소리를 쳤다. 사내가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주몽과 예 씨는 실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두 사람에게는 진정 꿈같은 밤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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