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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안상궁입니다. 명준 들었사옵니다.”
“명준이 왔다구? 어서, 어서 들이거라.”
고종의 마음이 바빠졌다. 곤녕합의 가장 어린 나인 명준이 행방불명되어 죽은 게 아닌가 걱정하던 차였다. 명준이 사뿐히 들어와 큰 절을 올렸다.
“어서 오너라, 명준아. 네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전하, 소인은...죄인이옵니다,”
“무슨 소리냐, 어린 네가 그날 얼마나 놀랐겠느냐!”
“전하, 저는 중전마마를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뛰어나가 놈들과 싸우고 싶었으나 너무 무서워서,...”
명준은 소리내지 않으려고 눈물을 삼키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다가 결국엔 울음이 터져나왔다.
“황송하옵니다, 전하,...”
이 말조차도 울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고종은 몸을 일으켜 작은 명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꼬옥 안아주었다. 고종의 눈에서도 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김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김홍집 대감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고종은 얼른 자세를 고쳤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정리했다. 잠시 후 김홍집이 들어왔다.
“전하, 밤사이 강녕하셨습니까? 신, 문후 여쭙습니다.”
“무슨 일인가?”
“전하, 저 아이는,...”
“신경 쓰지 말게. 아직 어린아이니까.”
“전하, 이 조서에 옥새를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김홍집이 종이를 내밀었다. 글을 읽던 고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종이를 든 손이 심하게 떨렸다. 고종은 종이를 내팽개쳤다.
“대감! 제 정신이오? 나더러 여기에 도장을 찍으라니.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을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또한 짐의 나라의 군대를 몰래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전하, 중전께서 궁궐을 빠져나가 어디 계신지 모른 채 벌써 이틀이 되었습니다. 국모의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사옵니다. 하여 나라를 위해 왕비 민씨를 폐위하심이 합당하다 사료되옵니다.”
김홍집은 당당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중전이 어디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데 그 무슨 망발이오! 그리고 무슨 변고가 있다 해도 나는 새로운 중궁을 들일 생각이 눈꼽 만치도 없소. 폐서인이라니! 절대로 국새를 찍을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고종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김홍집이 어떤 위인이라는 건 이미 여러 번 경험했지만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고종은 한스럽기 그지 없었다.
“전하께서 쉽게 허락하시지 않을 줄은 알고 있사옵니다. 시간을 좀 드리지요.”
김홍집은 이렇게 말하고 물러갔다. 거만한 말투였다. 고종은 화를 삭이고 명준에게 말했다.
“명준아. 이리 가까이 오련!”
명준이 다가앉았다.
“저들이 나의 중전을 아주 제거하려고 왜인들을 등에 업고 나를 겁박하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전하!”
명준이 다시 울먹였다.
“명준아, 너를 보니 중전을 다시 마주 대한 듯 위로가 되는구나. 이제부터 내 곁에 가까이 있어주련?”
넓은 이마를 가진 명준은 빛나는 눈과 단정한 입매가 예뻤다. 단아하고 총명한 왕비의 모습과 닮았다.
명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여러 번 달싹거렸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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