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릉 
대구 
울산 
제주 
)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백제로 도망친 후 아달라왕의 권력은 견고한 듯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길선이 뿌려 놓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김알지의 후손 구도(仇道)는 은밀히 구수혜(仇須兮)를 찾았다.
“거사가 들통이 났으니 장차 우리에게도 위험이 닥칠 거요.”
구수혜가 구도를 안심시킨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당분간은 사태를 주시하며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이대로 허송세월하느니 백제에 있는 길선 공을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소?”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길선 공이 돌아올 날을 앞당기는 겁니다.”
“어떻게 말이오?”
“아달라를 타락의 길로 이끄는 겁니다. 자고로 왕조가 기운 이유는 왕이 주색을 가까이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구도와 구수혜는 전과 다름없이 아달라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척하면서 교묘히 그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그들은 왕을 부추겨 하루가 멀게 잔치를 벌이고 전국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뽑아 바쳤다.
아달라왕이 환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해 사리사욕만 채웠다. 살기 힘들어진 백성의 원성은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보다 못해 뜻있는 신하들이 나서서 간했지만 간신들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구도와 구수혜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찬 계원(繼元)이 왕에게 독대를 청했다. 그가 침전으로 들어가 보니 어김없이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궁을 끌어안은 왕이 취기가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이찬께서 어인 일이시오?”
계원은 왕 앞에 엎드렸다.
“임금이 백성을 돌보는 일에 태만한데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주색을 멀리하시고 정사를 살피셔야 합니다.”
왕이 버럭 화를 냈다.
“그대가 짐을 가르치려 하는가! 귀찮게 굴지 말고 썩 물러가라!”
이찬은 물러 나오며 탄식했다.
“이 나라도 이제 끝이구나!”
이후로 계원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병을 얻어 소생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을 직감한 계원은 강직한 흥선(興宣)을 머리맡으로 불러 당부했다.
“항상 구도 무리를 경계하시오. 그들이 하는 짓으로 볼 때 역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오.”
흥선은 이찬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얼마 후 계원이 죽자 아달라왕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공이 큰 흥선을 이찬에 임명했다. 계원의 유언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흥선은 구도 무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도는 내심 두려워하던 계원이 떠나자 마음 놓고 계략을 이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에 대한 왕의 총애는 더욱 깊어 갔다. 덕분에 승승장구하여 구도는 파진찬, 구수혜는 일길찬이 됐다.
흥선은 구도 무리의 독주를 막아 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정 대신 대부분이 구도의 영향 아래 있었고 임금을 향한 백성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만 갔다.
서력 184년 봄 구도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정 신하와 6부의 원로들을 이끌고 아달라왕에게 나아가 옥좌에서 내려오라고 요구했다. 아달라왕은 돌변한 총신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이때였다.
흥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며 구도를 크게 꾸짖었다.
“네 어찌 이리 무례하냐? 감히 폐하의 안전에서 그런 망발을 늘어놓다니. 내 너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흥선은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구도는 왕을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별궁에 감금시켰다.
이 무렵 구도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백제에 망명해 있던 길선이 돌연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국왕으로 옹립하려던 인물이 사라졌으니 새로운 후보를 물색해야 했다.
구도는 구수혜 등의 측근과 의논해 길선의 아우인 벌휴(伐休)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새로운 왕의 등극을 알리는 포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지난날 남해왕께서 남긴 유언에 따르면 박(朴)씨와 석(昔)씨 중 덕망 있는 자를 골라 임금으로 모시라 했다. 오늘 날 박씨 아달라가 주색에 빠져 본분을 다하지 못하므로 석씨 중 덕망 있는 벌휴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자 한다.
벌휴왕은 천문·지리·역법 등에 두루 능통했다. 바람과 구름을 보고 그해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하고, 사람의 관상이나 사주를 살펴 정사(正邪)를 꿰뚫어 보기도 했다. 백성은 왕의 그런 신묘한 능력을 우러러보고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다.
벌휴왕은 친히 나라 안 곳곳을 빠짐없이 순행하면서 백성의 생활을 살피고, 부패와 부정을 저지르는 자를 엄벌했다. 바쁜 농사철에는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서 백성을 동원하지 못하게 해 수확을 늘리고 살림을 돌볼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 만한 나라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쳐서 합병했다. 군주라 함은 왕으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아 군사를 징발하고 휘하에 거느리는 권한을 가진 직책이었다. 이전에도 권신이 사사로이 가병을 두기는 했지만 국왕이 신하에게 공식적으로 군의 징발과 양성을 맡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구도와 구수혜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벌휴왕에게는 골정(骨正)과 이매(伊買)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왕은 장자인 골정을 태자로 삼았으나 명이 짧아 일찍 죽었다. 그 뒤를 이매가 이었는데 그 역시 일찍 세상을 등졌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모두 앞세운 국왕은 마음의 병을 얻어 몸져누웠다. 상태가 나빠져 사경을 헤매던 왕은 잠시 정신이 돌아오자 대신들을 불렀다.
“내 꿈을 꿨는데 골정과 이매가 나타나 절을 하지 않겠소. 아무래도 아이들의 뒤를 따를 때가 된 것 같소. 골정의 아들 조분(助賁)이 적손(嫡孫)이긴 하나 나이가 어리니, 이매의 아들 내해(奈解)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시오.”
며칠 후 벌휴왕이 숨을 거두었다. 신하들은 왕의 유지를 받들어 내해를 임금으로 옹립했다.
내해왕이 등극한 후로 백제의 잦은 침략과 수해·돌림병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국왕은 흔들리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태자를 책봉하기로 했다.
내해왕에게는 두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우로(于老), 둘째는 이음(利音)이었다. 둘은 한 뱃속에서 나왔지만 성격이나 외양이 매우 달랐다. 우로는 강하고 우직한 반면, 이음은 부드럽고 활달한 성격에 준수한 외모였다.
내해왕은 둘째 이음을 태자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하자가 없는 장자를 제치고 차자를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왕후는 이음을 책봉하는 데 결사반대였다.
“자고로 왕실에 분란에 생기는 이유는 순서를 지키지 않은 탓입니다. 후일에 골육상잔이 없게 하려면 장자 우로가 태자가 돼야 합니다.”
왕후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그래도 이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내해왕은 현직에서 물러난 노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지혜로 보나 덕망으로 보나 이음이 우로보다 훌륭하다. 우로는 강하기만 하고 부드러움이 없어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하지 않았느냐.”
구도는 왕의 뜻에 반대했다.
“이음이 왕위를 잇게 되면 앞으로 왕자들이 파당을 지어 권력 다툼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구수혜는 생각이 달랐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폐하의 판단이 옳은 듯싶습니다. 군주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 면에선 강직한 우로보다는 온후하고 관대한 이음이 왕좌에 어울립니다. 강하면 부러지지 않습니까.”
흥선이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자 국왕의 시선이 다다랐다.
“이찬의 생각은 어떠시오?”
“두 왕자 모두 군주의 자질을 갖췄습니다. 어느 분이 왕위에 오르셔도 우리나라는 번창할 겁니다. 다만 소신은 장자를 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흥선마저 우로를 지지했기에 내해왕은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우로를 태자로 책봉하기로 했다. 이음에게도 소홀하지는 않아 이찬으로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했다.
이즈음 남방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백제는 남해 연안의 맹주인 안라국과 손을 잡고 바다 건너 왜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압박했다. 이에 신라는 가락국과 다시 화친을 맺고 백제를 견제했다.
당시 왜 땅에는 백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화(大和) 지방에 있는 야마대국(邪馬臺國)이 가장 강성했다.
야마대국은 섭정인 비미호(卑彌乎)가 다스렸다. 그녀는 본디 신라 갈화성(竭火城) 밖 해안에서 살던 어부의 딸이었다. 열 살이 되던 해 바닷가를 거닐다가 왜구에게 붙잡혀 야마대국의 궁정으로 팔려 왔다.
세월이 흘러 비미호는 자태가 고운 처녀로 자랐다. 어느 늦은 밤 그녀는 후원을 청소하다가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비미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향에서 보던 달도 저렇게 크고 밝았지.”
부모님 생각이 간절히 나서 예전에 어머니에게서 배운 신라 가요를 불렀다. 밤공기를 가르며 은은하게 퍼지는 노랫소리에 연못의 고기들마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잠이 오지 않아 후원을 거닐고 있던 야마대국의 왕이 구슬픈 소리에 이끌려 비미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왕은 달빛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인의 자태에 취해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인기척에 놀란 비미호가 뒤를 돌아보자 왕이 서 있었다.
당황한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국왕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청했다.
“고개를 들라. 너의 노래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 짐을 위해 노래를 다시 들려줄 수 있겠느냐?”
비미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노래를 불렀다. 풀벌레조차도 그녀의 구성진 가락에 매료되었는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날의 소리판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비미호에게 반한 왕은 얼마 후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