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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12] 탄금대의 가야금 ③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1-21 06:30:10
 
 
우륵은 태양의 정기를 받는 듯 바위 위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계고와 벽지가 가까이 다가가도 우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지켜보던 계고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 할 때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들은 음률이 뭐라 생각하시오?”
 
그 소리는 마치 저 푸른 강물 밑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멀고 아득하면서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렸다.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두 사람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오. 그럼 알 수 있을 거요.”
우륵은 바위에 앉은 채 참선에 빠져 있었지만 목소리에 미묘한 가락이 묻어나고 있었다.
 
벽지가 정신을 차리고 우륵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노래에는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부하오. 그러니 우리 한번 겨뤄 봅시다. 만일 내가 진다면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겠소.”
 
벽지가 자신 있게 말하자 우륵은 조용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산새의 지저귐을 듣고 목소리를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오. 그대의 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오.”
 
계고가 나서 윽박질렀다.
자신 없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씀하시오.”
 
우륵은 호수처럼 고요한 눈으로 벽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벽지는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듯했다. 우륵의 눈은 평화스럽고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벽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눈빛에 임금이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우륵이 사술을 쓴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노래를 들려주시오.”
 
우륵에게선 어떠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벽지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국왕에 대한 칭송과 백성의 태평가가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됐다. 푸른 들판에서 단비를 맞으며 춤추는 곡식이 눈에 선했다. 절로 흥이 오르는지 계고가 어깨춤을 추었다.
벽지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륵의 입에서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치지 않고 흐르는 개울물 소리 같기도 하고,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유심히 들어 보면 잠에서 깨어난 풀벌레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 같기도 했다.
우륵의 가락이 벽지의 노래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선율이 전개되면서 기쁘기만 했던 음악에서 슬픔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내면 깊숙이 고여 있던 감정이 하나둘씩 길어 올려졌다.
벽지는 우륵의 가락 덕분에 자신의 노래 속에서 희로애락이 널뛰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바탕 감정의 격랑이 지나갔다. 온몸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깨끗이 빠져나간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벽지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평상심을 회복한 그는 우륵 앞에 엎드렸다.
제가 대가를 몰라봤습니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우륵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참선에 들어갔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벽지는 새로운 세계를 접한 놀라움과 기쁨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의 몸짓 하나만 보아도 나는 그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네.”
그는 자신이 우륵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계고는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 역시 우륵의 노래를 들었기에 그의 음률이 뛰어난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을 다루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끝없는 수련과 연마가 필요했기에 어릴 때부터 금에만 매달려 온 자신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이날부터 계고와 벽지·만덕 세 사람은 우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음률을 배웠다. 우륵은 성심을 다해 이들을 지도했다. 이들은 워낙 음률에 재능을 타고났고 오랜 수련으로 나름의 경지에 올랐기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달았다.
중국의 쟁과 비슷한 신라금과 달리 가야금은 12줄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야 했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빠른 손놀림을 요했다. 신라금에 익숙한 계고에게는 연주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륵은 자신이 만든 12곡 중 고향의 곡조인 이사를 계고에게 들려주었다. 계고는 선율이 흐르는 동안 상실감과 슬픔, 그리고 들녘에서 발산하는 자연의 생동감을 느꼈다. 그는 연주를 듣는 동안 내면에 잠재한 원초적 본능이 깨어날까 봐 두려웠다.
예악(禮樂)으로서의 음악만을 배워 온 계고에게 우륵의 곡조는 내면을 옥죄고 있는 사슬에서 풀려난 듯한 해방감과 함께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계고는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 곡조는 음란(淫亂)하고 혼탁합니다.”
 
닫힌 마음을 조금만 열어 봐라. 음률은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이 곡에 내 고향의 자유분방함을 담았다. 너도 편견을 버리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계고는 우륵의 가르침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주하는 기술은 늘어갔지만 혼이 없는 선율만 쏟아 낼 뿐이었다.
계고는 홀로 가야금을 타다가 답답해지면 탄금대 아래 있는 금휴포(琴休浦)로 내려가곤 했다. 그곳은 대문산 기슭과 강이 만나는 곳으로 우륵도 자주 거니는 나루터였다.
어느 날 계고는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에 앉아 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때마침 나룻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나루터에 와 닿았다.
나룻배에서 아리따운 처녀 하나가 보따리를 들고 내렸다. 계고는 처녀를 보자마자 갑자기 맥박이 빨리 뛰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빠 왔다.
처녀는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겁먹은 표정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계고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처녀 앞을 가로막았다.
처녀는 낯선 사내를 보고 놀라서 달아나려 했다.
계고가 황급히 말했다.
 
제발 가지 마시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소.”
 
계고는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이 처녀의 소맷귀를 잡았다. 백주에 봉변을 당한 처녀는 황급히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그 와중에 들고 있던 보따리까지 팽개쳤다. 계고는 뒤를 쫓지 못하고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계고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만덕과 벽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계고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며칠 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배꽃 같이 하얀 얼굴과 노루처럼 미끈한 자태가 떠올랐다. 소맷귀를 스칠 때 풍기던 들꽃 같은 체취, 사근사근한 감촉. 오감(五感)이 온통 그녀에게 집중돼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계고는 그때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어디 사는지 알아 두었더라면 이렇게 막막한 그리움 속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었다.
계고는 며칠 동안 침식을 거른 채 두문불출했다.
우륵은 그를 탄금대로 불렀다.
 
지금 너의 심경을 가야금으로 표현해 봐라.”
우륵은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가야금을 건넸다.
계고는 자신도 모르게 악기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가야금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첫눈에 반한 처녀를 떠올리며 샘솟는 열정과 애틋한 마음·슬픔·그리움·쓸쓸함 등을 고스란히 연주에 담아냈다.
계고가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에 풀벌레가 슬피 울고, 나무가 안타까운 듯 흔들거렸다. 들짐승까지 하나둘씩 모여들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우륵은 연주를 들으며 처음으로 감탄했다.
네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구나! 음률의 이치는 사모의 정과 같으니라. 더는 가르칠 것이 없구나.”
 
우륵에게서 인정받기를 그토록 바라 온 터이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계고는 우륵이라면 그녀를 찾아줄지 모른다고 막연히 기대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우륵은 여인이 떨어뜨리고 간 보따리를 가져오게 했다.
계고가 들고 온 보따리를 살펴본 우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 부스러기가 들어 있는 걸 봐서는 이 근처 산간에 사는 약초꾼이 틀림없을 것이다. 대문산 깊은 곳에는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곳에서 찾아보아라.”
 
이때부터 계고는 짬만 나면 대문산을 오르내리며 여인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얼마 후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처녀의 이름은 수영(秀英)이었다. 대문산 깊숙이 위치한 범아골이라는 곳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에게 받혀 몸져누운 이후로 수영이 약초를 캐어 연명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영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마치고 나오다가 오두막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계고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날 자신을 막아섰던 사내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계고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해치지 않소.”
말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순간, 수영은 발길을 멈췄다. 산중의 해는 짧아 어느새 황혼이 깃들고 있었다. 계고는 붉게 물든 노을을 등지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의 무릎 위에는 어느새 붉은빛이 도는 가야금이 놓여 있었다.
계고가 연주를 시작하자 그의 마음이 선율을 따라 수영에게 전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가야금 선율이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갔다. 연주가 이어지면서 수영은 계고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친밀하게 느끼게 됐다.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약초를 캘 때 부르는 노래를 읊조렸다. 신기하게도 그 노래는 계고가 연주하는 곡조에 너무도 잘 어울렸다.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지만 계고의 탄주는 그칠 줄 몰랐다. 밤새 수영과 함께할 수 있다면 손가락이 갈라지고 피가 흐른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늘의 별이 하나둘씩 두 사람 주위로 모여들었다. 계고와 수영은 별 무리 속에서 가락에 몸을 맡겼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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