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5] 다시 또, 3년 만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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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8 06:30:10

장을 보고 돌아온 정하운이 끓인 죽을 몇 숟가락 뜨긴 했지만 주결은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엔 나도 2층에 올라가 에바의 노트를 펼쳐 들었다. 독일에서 돌아온 에바는 또다시 그녀를 희롱하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이 휘말리고 있었다.

- 나타샤와 소피아, 마리아와 함께 3년 만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나타샤 영자는 동생 둘을 대학에 진학시켰고 광부였던 덕수 씨와 결혼했습니다. 소피아 옥순은 친척 집에 맡겨 놓았던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와 그때 한창 개발 중이던 강남의 한 아파트에 드디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지요.

주말도 휴일도 없이 정규 근무 외 다른 병원에서 야간 근무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마리아 점례는 부모님의 빚을 다 갚은 것은 물론 집까지 사 드렸습니다. 동네에서 효녀 났다고 잔치까지 벌어졌다며 은근히 자랑도 했습니다. 당신이 일하던 대학병원으로 복귀해서 간호과장으로 자리도 잡았지요. 모두가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기다리는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모은 돈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시아버님이 느닷없이 쓰려져 돌아가시자 차곡차곡 송금한 통장을 남편이 가지고 나가 도박으로 모두 탕진한 뒤였습니다. 종합병원에 어렵게 자리를 얻었지만 남편이 찾아와 몇 차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얼마 다니지 못했습니다. 혈혈단신 혼자인 것보다 가족의 울타리가 있는 게 좋을 거라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시아버지의 염려가 내겐 더 지독한 올가미였습니다. 좋은 인연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나에게는 전생의 악연이 부부가 된다는 말이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내 사정을 알게 된 점례가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의원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며 조금 갖고 있던 돈과 옥순의 도움을 받아 작은 전세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은 돈이 떨어지면 의원으로 들이닥쳐 또 행패를 부렸습니다. 집까지 찾아내 남편 행세를 하고 나도 모르게 전세금을 빼내 월세로 바꿔 놓기까지 했습니다. 몇 차례 남편이 소란을 벌이는 통에 동네 의원도 계속 다닐 수 없게 되었지요. 남편이 내게 떠넘긴 빚은 빚대로 남고 사글세도 몇 달째 낼 수 없었습니다. 쌀도 살 돈이 없어 며칠씩 굶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는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삶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양실조와 급성 폐렴으로 쓰러진 나를 발견한 건 모처럼 찾아왔던 영자였습니다. 영자는 점례가 있는 병원으로 나를 옮겼지요. 나는 병원 내 약국으로 숨어 들어가 수면제를 훔쳤습니다. 눈을 떠 보니 응급실에서 당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더군요. 보다 못한 점례가 당신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그렇게 당신과 나는 3년 만에 재회했습니다. 영양실조와 폐렴, 거기에 위세척까지 마친 내 몰골 앞에서 당신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나를 나무라지도 않고 한동안 침상 옆에 말없이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당신을 외면하고 있었지요.

“군의관을 마친 뒤 독일로 유학을 갔었소.”

당신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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