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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귀순인가 비행 착오인가
1970년 12월3일, 국내 방송들이 놀라운 뉴스를 하나 전했다. 북한의 공군 소좌 박순국(당시 33세)이 MIG-15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가 당연히 대방동에 있는 미 502군사정보단 수용소로 후송되어야 했는데 이문동에 있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단독으로 관리하는 바람에 미군 측에서는 접근도 못 했다. 미8군 G-2를 위시해서 미 502군사정보단과 주한 미국대사관이 의혹을 제기하고 항의를 했으나 한국 정부에서는 박순국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단속을 했고, 단순 귀순자로 언론에 보도하고 군사기밀을 빙자해 외부의 접근을 차단했다.
여러 가지 의혹이 난무했으나 한국 정부와 주한 미8군 사이에 모종의 묵계가 이루어진 듯 1970년 12월8일에는 정내혁 국방장관과 UN군 사령부 참모장 스미스 중장이 만약 북한이 박순국의 송환을 요구할 경우 그것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 당시 모든 의혹의 초점은 박순국이 단순 귀순자이건 우연히 불시착을 한 것이든 간에 적군의 전투기가 백주에 비무장지대를 넘어서 남한 땅에 들어왔는데 국군의 지상군이나 공군의 레이더가 그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가뜩이나 그때는 야당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 사실이 정치적인 이슈로 번질 경우 집권 여당과 정부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백주에 적군의 전투기가 들어왔는데 아무도 몰랐다면 우리가 뭘 믿고 당신들에게 국방을 맡길 수 있겠느냐”고 항의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아주 민감한 그런 사안이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박순국이 자신은 비행 착오로 남한에 온 것이지 귀순이 아니니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해 달라고 완강히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에선 1960년에 MIG-15기를 타고 귀순한 정낙현을 앞세워 박순국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순국은 결국 고집을 꺾었다. 대한민국 정부에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누가 묻든 오랫동안 남한을 동경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대한민국에 귀순한 것으로 말하기로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후 박순국은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탈출 경위와 귀순 동기를 밝혔다. 이어서 한국 정부는 박순국이 중부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날아올 때 공군기 4대를 동원해 박순국의 비행기를 안전하게 유도하여 강릉해수욕장 백사장에 안착시켰다고 발표했다.
거짓말과 거짓말의 대결
그때 UN군 사령부와 미8군 G-2와 미 502군사정보단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에 박순국 면접을 요청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박순국의 입에 이미 단단히 자물쇠를 채워 놓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단 하루 면접을 승인했다. 미군 측에서는 나를 박순국의 심문관으로 선정했다.
그때가 1971년 3월 말경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미국 측 심문관이라면 박순국이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미국 냄새를 풍길 물건을 소지하지 않기 위해 문방구에 가서 국산 볼펜을 사고 대방동 공군본부에 가서 공군 전용 조서 용지를 얻어 오는 등 준비를 해서 이문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대공 합심반(합동심문반)에 가서 박순국을 만났다.
깨끗하고 아담하게 꾸며 놓은 심문실에 나와 박순국이 테이블 양쪽에 마주앉아 차분하게 심문을 시작했다. 내 등 뒤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모니터링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박순국이 눈치채지 않게 테이블 밑에 둔 녹음기의 스위치를 누르고 입을 열었다.
우선 대한민국에 귀순한 것을 환영한다는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간단한 인적 사항을 묻고 천연덕스럽게 그의 탈출 경로와 귀순 동기를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그대로 박순국은 중앙정보부가 시킨 대로 거짓말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침착하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의 거짓말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거짓말과 나의 거짓말이 벌이는 고도의 신경전에서 내가 승리하게 되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것이 바로 유능한 심문관의 능력이다.
“박 선생, 오늘은 이렇게 합시다. 박 선생은 신문기자나 외부 인사들과 대화를 할 때는 추호도 착오가 없이 우리 정부가 부탁한대로 대답을 해야지 실수를 하면 정치적으로 대단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 선생도 이미 알고 있고 나도 우리 정부의 입장을 다 알고 있는 처지인 만큼 오늘의 면담은 다른 차원에서 진행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공군본부 작전국에서 나온 이동진 대령입니다(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늘 내가 박 선생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건 정치적으로 도색된 내용이 아니고 박 선생이 체험한, 즉 실제로 있었던 일들에 관한 것이니 사실대로 자세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 공군이 피아(彼我)의 허점과 약점을 알고 작전 개념을 정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착오가 없어야 합니다.
이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군사기밀로 취급될 것이며, 우리 정부가 박 선생에게 이미 부탁한 각본에 대한 위반이 아니며 오히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협조이고 애국하는 작업입니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박순국은 내가 던진 낚싯밥을 물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것이 높은 차원의 애국이라는 점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대한민국에 협조하겠다는 그의 진심이 입증된 셈이다. 박순국은 내가 묻는 말에 정부에서 만들어 준 각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꼼꼼하고 차분하게 사실을 진술해 주었다. 그 내용의 요점을 기억이 나는 대로 여기에 적어 보겠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한 박순국
[박순국 소좌는 북한 공군 원산기지 소속, 소위 공화국 1급 조종사였다. 그는 남한에 귀순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타고 있던 MIG-15기에 결함이 발생하여 자신이 비행기를 몰고 신의주 바로 밑에 있는 ‘양시 비행기 수리창’에 가서 수리를 했다. 그 당시 북한은 공군 전투기의 엔진과 중요한 부품 외에 일반부속품은 자체 생산이 가능했고 모든 비행기의 수리를 이곳에서 했다.
박순국은 수리가 끝난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원산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타면 무조건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그가 생각하기를 자기는 공화국 1급조종사이며 원산까지 가는데 불과 15분도 안 걸리므로 산소마스크가 필요없다고 자만한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일단 고공에 올라가자 산소 결핍으로 조종사 박순국은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그는 분명히 원산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행기는 백주에 중부전선을 지나서 남한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지상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북한 상공이라고 생각하고 기수를 동해 쪽으로 돌렸는데 앞에 나타난 곳이 포항이었다. ‘아차! 비행 착오다’ 싶어 당황한 그는 급히 북상했다. 비행기에 연료가 부족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보이는 백사장에 불시착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곳이 강릉 해수욕장이었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보니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몰려오는데 그들의 복장이 남한 복장이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박순국은 자신이 남한 땅에 불시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의 공군이나 지상군·경찰의 공격이나 저항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박순국은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의 신변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고 있는 동안 완강하게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송환해 달라고 주장하였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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