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526년 신라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자체 연호를 사용했던 법흥(法興)왕이 죽고, 나이 7세인 조카 삼맥종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진흥(眞興)왕이다.
즉위 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12년(551) 정월부터 친정을 하면서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했다. 이후 29년(568)에는 태창(太昌)으로 바꿨고, 33년(572) 정월에는 홍제(鴻濟)로 바꿨다.
진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손자 진평왕은 6년(584)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했고, 다음 보위에 오른 진평왕의 장녀 선덕여왕은 3년(634) 정월에 인평(仁平)으로 바꿨다. 진평왕의 질녀였던 진덕여왕은 즉위 원년(647) 가을 7월부터 태화(太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렇듯 자체 연호를 쓰던 신라가 느닷없이 진덕여왕 3년(649)에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이듬해에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게 된다. 120년 넘게 자체 연호를 사용했던 황제국 신라가 졸지에 당나라 제후국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신라가 자체 연호 대신 당나라 연호를 쓰게 된 까닭은?
경상도에 있던 신라는 육지로는 고구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당나라에 갈 수가 없고, 바닷길만이 유일한 통로다. 신라가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백제에게 빼앗기자 당나라와의 바닷길이 끊겼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는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는 의미다.
▲ 신라는 당항성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바닷길로 당나라에 갈 수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당시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 나라가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몰리게 되었고, 김춘추는 개인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자체 군사력이 허약했던 지라 고구리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을 요청하기로 했다. 고구려 보장제는 평소 김춘추에 대해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병사들로 하여금 호위를 더욱 엄중하게 한 다음 그를 접견했다.
김춘추가 “지금 백제는 무도한 독사나 돼지처럼 우리 강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왕께서는 대국(고구리)에게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한다면서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장제는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고구리 땅이었다. 만일 너희가 우리에게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도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춘추는 “제가 우리 국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청한 것이거늘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낼 뜻은 없으시고, 단지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해 땅을 돌려달라고 하시는군요. 저는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강경하게 대답했다. 보장제는 김춘추의 말이 심히 불손함에 대노하고는 김춘추를 별관에 가두라고 명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자택으로 초청해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悖逆)하기가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데 삼국이 서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수도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 낸다면 그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쟁에서 이긴 후에 옛 영토에 따라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仁義)로써 함께 다스리도록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것을 영원히 준수하도록 함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했으나 김춘추가 듣지 않아 애석한 일이었다고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기록돼 있다.
김춘추는 민족적 대업의 달성보다는 백제군에 의해 죽어간 딸과 사위 복수만을 머릿속에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연개소문이 김유신에게 민족단합을 제안하는 장면 [이미지=필자제공]
김춘추는 연금 상태에서 몰래 도망쳐 귀국했고, 진덕왕 2년(648) 이번에는 당나라로 찾아가 태종 이세민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를 칠 원병을 요청했다. 당 태종은 신라를 이용해 우리 민족 전체를 먹어치울 속셈으로 군사지원을 약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당태종이 김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며 “경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을 해보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김춘추는 무릎을 꿇고 앉아 “신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됐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마음대로 침략하고 있으며, 더욱이 지난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와서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대국에 조회할 길이 막혔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대국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으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서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당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기면서 즉각 파병을 허락했다.
김춘추는 또 관리들의 복식도 중국 제도에 따르겠다고 청하니, 이에 당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옷을 꺼내오도록 하여 김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내려 줬으며, 조칙으로 김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시키고, 아들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김춘추가 신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의 관리들이 참석한 송별연을 열어줬을 정도로, 당태종은 김춘추를 극진하게 우대했다. 또한 김춘추가 아뢰기를 “제게는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문왕이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숙위(宿衛)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에게 숙위할 것을 윤허했다.
김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 순찰선을 만났으나 시종인 온군해가 김춘추 대신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았다. 순찰병은 그를 김춘추로 알고는 잡아서 죽여 버렸다.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김춘추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슬퍼하며 온군해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려줬다.
▲ 삼국통일의 영웅이라는 평과 함께 민족반역자·사대주의자로 비판받는 김춘추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 사관, 자체 연호 사용 비난… 모화사상 극에 달한 논평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덕여왕은 비단에 오언시 태평송(太平頌)을 적어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 당나라에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을 제수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아래 태평송의 내용은 이민족 당나라를 찬양하는 문구로 가득하다.
위대한 당나라 왕업(王業)을 여니, 높고도 높은 황제의 길 창창히 빛나네.
전쟁을 그쳐 천하를 평정하고, 문물을 닦아 백대를 이어가리.
하늘을 본받음에 은혜가 비 오듯 하고, 만물을 다스림에 도리와 한 몸 되네.
지극히도 어질어 해와 달과 짝하고, 운까지 때맞추니 언제나 태평하네.
크고 작은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이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외방 오랑캐여! 명을 거역하는 자는, 칼날에 엎어지는 천벌을 받으리라.
순박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먼 곳 가까운 곳 상서로움을 다투네.
사계절이 옥촉(玉燭)처럼 조화롭고, 해와 달과 별들이 만방에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받아 어진 재상 내리시며, 황제는 충후한 인재를 등용하도다.
삼황과 오제의 덕망이 하나 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라.
또한 ‘삼국사기’ 사관은 신라의 자체연호 사용에 대해 신랄하게 질타했다. 사관이 평하기를 “삼대(三代)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칭한 것은 모두가 대통일을 이루고서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같은 때에 나란히 일어나 천하를 다투며 양립한다거나, 간사한 영웅이 기회를 얻어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변두리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속한 신하 나라는 결코 사사롭게 연호를 칭할 수 없다”라고 했다.
사관은 또 "신라의 경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이 타고 가는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연달았는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했으니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다. 그 후에도 그러한 잘못된 연호를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의 나무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 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고칠 수는 있었다고 할 만하다.”라고 기록했다.
참으로 중화사대 모화사상이 극에 달한 사관의 구역질나는 논평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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