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그랬다. 서류상에만 준호가 남편이었다. 다른 모든 일은 주변의 남자들이 돕고 해결했다. 준호는 자기가 라라의 남편이라는 착각에 빠진 외인이었다.
그들 셋이 함께 있을 때조차, 사람들은 라라와 후원을 부부라고 오해하곤 했다. 김후원이나 라라 두 사람 중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조차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말 그대로 순수한 우정이었다. 거기에 추문이 개입하는 것이 그들에겐 생소할 뿐더러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부부처럼도 보이고 남매처럼도 보이고 연인 관계처럼도 보였을 테지만, 유독 당사자인 두 사람만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김후원의 애인인 러시아 여자 올가가 간혹 라라 문제로 그와 실랑이하는 일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라라에게 김후원은 나이도 제법 있는 아빠 같고 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것은 마치 근친 간의 불미스러운 감정으로나 치부될 만큼, 이상하게 두 사람의 감정은 서로에게 초여름 날 밥상 위의 상큼한 물김치처럼 정갈했다.
그래도 올가는 후원이 라라에게 대하는 감정이 간혹 우정 이상이 아닐까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마도 후원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녀와 사귀기 때문일 것이었다.
“한국에서 선을 봤는데, 나는 아무래도 한국 여자하고는 못 살 것 같다.”
후원이 언젠가 라라에게 한 말이었다. 한국 여자들과 대화가 안 통한다는 거였다. 그는 라라에게만은 늘 허심탄회했다.
“올가가 자꾸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해서 아주 부담스럽다니까요.”
러시아 여자들은 대학가지 않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올가에게는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6년 넘게 사귀던 후원이 청혼하지 않는 것은 불안하고 힘든 일이었다.
라라로서는 올가를 서운하게 만들거나 원망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기헌과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발전했어도, 그 죄책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괴로웠다. 친구의 사랑을 탐하는 것은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올가가 결국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라라는 올가에게 좀더 따뜻이 대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전 임신은 여자에게 힘든 결정일 수밖에 없음을 라라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올가는 아름답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심성 고운 여자였다. 이제 그녀는 노처녀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이에 달해 있을 만큼 후원과 함께 지낸 세월이 길었다. 라라는 후원이 올가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중에 올가가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임신을 결행했던 거였다.
“후원이 뭐라 해도 아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올가는 가장 가까운 한국 친구인 라라에게 고백했다.
“남자들은 아이라도 있어야 떠날 생각을 포기하거든요.”
물론 라라는 후원이 올가를 버리고 떠나는 건 무조건 막을 작정이었다.
“남녀 간의 우정도 귀한 것이지만 여자들 사이의 우정은 희귀한 만큼 더 소중한 것이기도 해. 나는 널 존중해, 올가. 남자가 그 정도 여자를 데리고 있었으면, 책임져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야.”
후원은 결국 올가와 결혼 신고했다.
“내가 늙은 모양입니다. 전에는 절대 결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한 여자한테 묶여서 살기로 한 걸 보면 말입니다. 살다 보니 그런 날도 오네요.”
“늙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안 그랬으면 죽어도 할 사람이 아니죠.”
라라의 말에 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