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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는 한 우물만 파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장인들에 관한 일화들이 MSG까지 곁들여져 강조되곤 했다. 물론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다는 것, 장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성공의 첩경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팔방미인이 더 각광을 받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스티브 잡스의 등장으로 문화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도래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전화기와 컴퓨터라는 상이한 제품을 조합시켜 일상생활의 대변혁을 몰고 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십 년 전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혼성모방’을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로 역설한 바 있다. 문화적 새로움이 고갈된 막다른 골목에서 대안으로 모색된 ‘융합’ 혹은 ‘혼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세기말까지만 해도 그렇게 호응이 크지는 않았다. 그랬다가 세기 초 잡스의 충격파로 말미암아 모더니즘의 순혈 순종의 도그마는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의 예술도 ‘새로움’에 대한 개념을 달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과거의 것보다 곧은 선을 그리면서 발전, 혹은 개선시킨 결과를 새롭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로 회귀하는 복고풍이든, 혹은 두 가지 이상을 결합시켜 새로운 종을 파생시킨 양상들에 대해서도 적용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타인의 작품들을 ‘인용’ 혹은 ‘차용’이라는 조합 양상은 새로움의 범주를 거의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자연계 내 지배적 위상에 대한 반성들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자연이 지배나 군림의 대상이 아닌 상생의 대상이라는 세계관이 두드러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조합이 많아지면서 주체가 희박해지는 결과를 놓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하이브리드의 경쟁력은 이미 사회 전반에 걸쳐 우세종으로 판명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며 거부할 수 없는 문화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시각예술계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권치규(성신여대교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조각가이면서도 회화적 요소를 결합시켜 조각계에서도 회화성이 대단히 풍부한 작가이다. 초기부터 상생과 복원력을 주제로 작업을 해오면서 항상 상이한 두 가지의 조합을 설정하고 있었다. 초기의 양식은 주름이 많이 표현되어 ‘주름 시리즈’라 부르는 작업으로서, 대단히 개성적인 양식과 방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집/사람, 집/나무 등의 조합을 구성하는 방식이 서로 등지고 있으면서도 작가의 심볼과도 같은 주름으로 동일화되는 방식이다. 앞에서는 분명히 집 실루엣인데, 뒤로 가서 보면 사람 형상의 실루엣으로 변신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대단히 철학적인 세계관과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작가가 제시한 ‘집=사람’, 양자의 동일성은 명제라기보다는 수사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 만물 유전론이나 불가의 윤회적 세계관 같은 것들이 얼핏 엿보인다. 진리의 상대성과 불확정성의 인식이 일면적으로 읽히면서도, 집 문제로 들썩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았을 때는 인간의 욕망을 꼬집고 있는 것 같은 면도 분명히 느껴진다. 아무튼 인간을 향해 쏜 빛은 뒤에 집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는 표현은 단조로운 구조 속에서도 다양하고 심오한 해석을 계속 확산 증대시키고 있다.
아쉽게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작업임에도 최근부터 작가는 다른 양식으로 전환해가고 있다. 더 드라이브를 걸었으면 하는 기대도 많았지만, 너무 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작업을 따라하면서 작가는 더 지속의 흥미를 못 느낀 것 같다. 하지만 그 주름 양식이 준 임팩트는 강렬했다. 특히 대상의 다원성이나 이질성의 조합 양식은 그다지 친절한 설명을 부연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이종적 결합이라는 구조에서 충분히 비유의 탐색과 사유의 도출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다재다능은 근작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근작에서는 시각적으로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결합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간을 연출, 해석하는 설치 양식과 빛을 결합시켜 판타지 같은 그림자 영상미를 연출하는 다양성의 집합이 끝이 없다. ‘생태-복원력’이라는 주제 아래, 싱그러운 연두색 신록의 버드나무 줄기들이 여러 겹의 레이어로 표현되는 작품들이 많다. 맑은 개울물 위로 펼쳐지는 정겨운 풍경으로 말미암아, 이것의 재료가 차디찬 스텐리스 소재인 것조차도 인지되지 않은 채 자연의 속살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정황에 몰입하게 된다.
그냥 유화나 수묵 같으면 흔한 소재일 수도 있는 것이 금속 판금과 채색으로 한 것이기에,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로 타원의 프레임으로 된 ‘복원력-흐름’의 상부에 있는 버드나무 잎새들을 보면 연두색이 숨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 금속의 물성이 결합되어 바람이 불 때의 녹색(개념 속에 들어 있는 녹색)의 상실을 인상주의자들이 관찰한 그대로 표현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햇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잎새들이 육안에 녹색으로 보이는 경우가 드물다. 게다가 물보라가 이는 물살을 보면서 그림 이상의, 아니 사진 이상의 재현성에 사람들은 자꾸 가까이 다가가 디테일을 한참동안 뜯어보면서 묘미에 눈을 떼지 못한다.
‘생태 복원력’이라는 주제는 ‘환원’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미는 이전의 주름 연작에서도 발견된다. 집 이미지가 뒤에 가서 사람 이미지로 수렴되는 것은 결국 문명의 구심점을 인간으로 인식하고, 따라서 인간 중심의 문명과 예술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음이다. 금속 고유의 물성은 물성대로 살아 있는 가운데, 자연의 이데아가 자연스럽게 투영된 환영이 살아 있는 융합 양식은 다소 식상해가는 현대조각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도 가치가 있다. 기존의 분야가 새로울 수 있는 길은 이제 명확해졌다. 새로운 짝짓기를 작가처럼 부단히 시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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