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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와 과오가 뒤바뀐 노태우 전 대통령 평가
역사학자 카(E. H. Carr) 교수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소련이나 중국 등 좌파 전체주의 정권, 공산주의 정권은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집권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서 통치하는 인민들의 의식을 조작해야 했다. 이를 위해 집권 공산당의 입장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편집하고 날조함으로써 공산당 통치의 정통성을 보충하려 한다. 좌파 역사가답게 카는 현재의 지배 세력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조작한 사례는 늘 있어 왔다고 했다.
현재의 지배적 가치가 과거를 인식하는데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역사는 허구인가?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당성 있는 정치 세력이 집권하는 정상적인 공화국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조작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날조와 허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정당성 없는 정치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역사적 사실의 날조와 허구의 정도를 살펴보고 그 정권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허구 속에서 진리를 찾는 그 작업도 역사학 연구의 일환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타계했다. 오랫동안 주사파와 좌파 진영 인사들이 쿠데타 세력이라고 거품 물고 국민들을 선동해 증오의 대상으로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노 전 대통령이 죽자 현 정권이 그에 대해 평가를 내렸는데, 성과와 과오를 뒤바꿔 평가했다. 마음의 거울이 삐딱하면 그 영상도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과오’와 ‘성과’를 함께 언급했습니다. ‘(5·18과 12·12 등)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 정책 추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성과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문 대통령이 직접 조문은 하지 않고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보내 추모했습니다.” (MBC, 2021.10.27.)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성과는 군사 정권의 유혹을 이겨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여 헌법에 따라 임기가 정해진 공직을 경쟁적으로 차지하는 공화정의 근본 원리, 즉 헌정주의 원리를 정상화시킨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자가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을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많다. 다행히 당시 대한민국은 공화정의 상식을 가진 양심 있는 집권자를 가졌던 것이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과오는 문 대통령이 성과로 꼽았던 바로 그 부분, 즉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다. 북한 집권자의 교묘한 공작과 회유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무지한 노태우 정권 핵심 세력의 공명심과 헛된 야심이 작용해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변명으로든 북한의 체제 전환 기회를 날린 것은 민족의 앞날을 망친 역사적 과오다.
1989~1991년 세계 사회주의 정권들이 체제 전환을 하던 당시에 북한도 스탈린주의 체제의 일종인 ‘우리식 사회주의’를 버리고 체제 전환을 했어야 했다. 다른 사회주의 정권들이 체제를 바꿀 때 북한도 함께 바꿨다면 지배 계급으로 군림해 왔던 조선 노동당 당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어 정권 내부적으로도 큰 저항 없이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한 북한 김일성은 대한민국 집권 세력을 끌어들인 정치 쇼로 체제 전환 거부의 명분을 만들어 수령 독재 체제를 지켰다. 그 결과 북한은 개혁과 개방의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해 21세기에도 스탈린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가 됐다. 국제적 고립을 자초해 경제가 퇴보하는 실패 국가로 전락했다.
이후에는 민족의 장래를 망치는 역사의 연속이었다.
북한 정권은 직면했던 체제 붕괴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핵무기만이 자신들의 정권과 체제를 방어할 유일한 대책이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후속 조치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 개발을 덮는 위장막이 됐다. 북한 인민의 삶보다 핵 개발이 중요한 과업이 됐고, 거기에 모든 국가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2005년 핵무기 보유 선언,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차례에 걸친 핵 실험, 미사일 성능 고도화 등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국제 제재는 강화됐고 북한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고립됐다. 그렇게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의 핵 위협에 계속 시달리게 됐다.
이와 함께 북한 인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될 당시 사회주의 선동에 넘어갔던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은 20세기 말부터 사회주의의 헛된 망상을 벗어던지고 시장경제 체제를 굳건히 발전시키고 있다. 그 결과 아프리카나 아시아 중남미 국가 대부분은 지금 1인당 국민 소득이 3~4000달러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북한은 2018년 기준 870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거 1970년대까지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원조한 나라가 지금은 그들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북한의 체제 전환 기회를 날린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당시 남북 집권 세력들의 공동 정치 쇼가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인 셈이다.
한편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세계사적 변화의 현실에 맞지 않게 잘못 설정한 평화·교류 등 남북 관계 규정은 이후 대한민국에서 주사파, 좌파 계열의 정치 세력들이 집권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 종전 선언
전체주의 전제정·집산주의 경제 체제와 공화정·시장경제 체제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현실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체제 문제를 민족이라는 감성적인 말로 포장해 마치 실현가능한 듯이 남북 주민들을 현혹한 정치적 사기 문건에 불과하다.
“(전문) 남과 북은…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제15조) 남과 북은 민족 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자원의 공동 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 교류, 합작 투자 등 경제 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남북기본합의서>, 1991.12.13.)
‘민족 경제’가 뭔지, ‘어떤 체제로 통일을 지향하겠다’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장 가격제와 지시 가격제, 자유로운 시장 거래와 계획 기관이 명령하는 거래, 사유 재산제와 공산주의적 국유화는 어떤 식으로든 양립할 수 없는 경제 체제다. 그래서 통일을 논의하려면 먼저 체제에 대한 합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 문건에는 온통 ‘민족’이라는 포장으로 남북한 주민들을 기만하는 사기 술책만 가득하다. 이런 허황된 합의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과 북한 인민들을 기만한 당시 집권 세력들은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가치의 원천이 노동에서 지식으로 변한 지식경제시대에 각국은 지식경제 친화적 제도를 구축하고 국민들을 지식 생산자로 양성할 수 있도록 국가 대 개조, 민족 대 개조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어 지식 생산에 불리한 전체주의 국가들은 망하고 공화정과 시장경제 체제 국가들만 번영할 것이다. 북한도 이런 세계적 흐름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빨리 체제 전환에 나서야 한다.
이런 전환의 시대에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 선언’을 주장하고 나섰다. 과거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때처럼 사전에 북한 정권과 교감이 있었던 듯하다. 종전 선언 주장은 북한과 중국에게 유엔사 해체와 주한 미군 철수의 명분을 주는 이적 행위라고 본다. 지금 북한에 시급한 것은 체제 전환이지 종전 선언이라는 정치적 술책이 아니다.
“미국의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현지시간으로 26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종전 선언과 관련해 ‘한미 북핵 수석대표 간 협의가 매우 생산적이고 건설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양국 간 시기와 조건 등 관점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종전 선언에 대한 사실상 미국의 첫 공개 언급으로, 한미 두 나라가 대북 접근법에 협력하고 있지만 양국 간 일정 부분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 (BBC, 2021.10.27.)
외교적 표현으로 치장했지만 바이든 정부 설리반 안보보좌관은 종전 선언을 거부했다. 북한을 대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북 제재 완화나 종전 선언 등이 필요하다는 현재 한국 정부의 주장은 북한 핵 문제 대화에 전제 조건을 붙이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나 종전 선언의 정치적 효과는 꼭 같다. 북한 정권에게 체제 전환을 거부할 명분을 쥐어준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북한 주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민족의 미래를 갉아먹는 어리석은 정치 술책이다.
종전 선언을 주장하는 모든 정치 세력들은 민족의 번영을 가로막는 반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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