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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가 3개월 간격으로 치러지면서 정권이 교체되고 지방권력까지 바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외견상으로는 ‘무능하고 오만한 정권’에 대해 유권자들이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리는 시그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민주주의는 ‘민주화’에 이어 ‘공고화’, ‘심화’의 세 단계를 거치며 나아간다. 한국의 ‘민주화’ 출발점을 1987년으로 잡을 때 한국에선 35년에 걸쳐 모두 네 번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공고화’의 지표로 흔히 사용되는 ‘두 번의 정권 교체’와 ‘민주화 이후 12년 이상 경과’라는 조건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심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앞으로 전진만 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다시 권위주의로 퇴행하거나 정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권력 분립·정당·유권자가 그것이다. 이것들에서 균열이나 타락의 조짐이 나타나면 민주주의의 실효성이 흔들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에서 권력 분립은 그 기틀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다수(多數)의 폭정’과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다. 집권 세력은 상대편 숫자가 적으면 국민보다는 정파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행동한다. 지난 민주당 정권의 폭주를 떠올리면 된다. 그래서 권력 사이에 상호 견제와 균형이 필수다.
그동안 아무리 집권여당이어도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과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불거진 국회의장 관련 일화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쌓아 온 ‘공든 탑’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올 하반기부터 새로 국회의장을 맡은 김진표 의원은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회를 운영할 때 국회의장의 중립 의무를 접어 두고 민주당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는 충성 서약이다.
이뿐 아니다. 문재인정부 때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국무총리 제안을 받자 한때 3부 요인이었던 자부심을 버리고 얼른 대통령 아래로 들어가는 ‘굴욕’을 택했다. 박병석 전임 국회의장은 야당의 필리버스터 강제 종료를 위해 한 표가 부족하자 스스로 찬성표를 던져 180표를 채웠다. 국회의장은 여야를 뛰어넘어 국민에게 신망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권력 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가 위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증거다.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에서는 집권 세력의 장악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됐고 실제로 목적 달성에 성공했다. 선거의 ‘심판’들도 탈이 났다. 선거 관리의 주무 장관이었던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나는 법무장관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여당의 국회의원”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보여 온 ‘민주당 사랑’은 눈부실 정도였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행정부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주의 훼손에 앞장섰다. 4년 전 울산시장 선거의 개입 의혹은 사실이라면 중대 범죄다. 2년 전 총선 전날에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자들에게 미리 통보하고 신청부터 받으라”며 유권자들에게 ‘현금 지급’을 환기시켰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호남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대선 직전에 군산으로 내려가 ‘조선소 재가동 협약식’을 가졌다. 실제 재가동은 1년 뒤에 이뤄질 예정이었으니 ‘가불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이것이 민주당 그들만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으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졌다.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의 선거 개입 금지가 당선인 시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내세워 전국 순방에 나섰다. 또한 선거일 직전에 접전 지역인 세종시에서 국무회의를 가졌다. 사실상의 선거 지원이다.
지난달 27일 자영업자 소상공인에게 지급될 23조원의 추경안 처리가 국회에서 막히자 윤 대통령은 “혹시 추경안이 처리될까 싶어 오후 8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고 밝혔다. 6월1일 선거일 전에 ‘입금’되도록 챙기고 있다는 뜻이다. 내각에 여성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계속되자 여성 장관 후보와 차관급 인사를 4명 연속 지명했다.
국민의힘과 2030 여성 사이의 불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여성 각료를 임명할 일이지 뒷북은 뭔가. 선거에만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국회 탄핵을 받았을 때 문제가 된 발언인 “총선에서 국민이 여당을 지지해 줄 것으로 믿는다”는 말과 비교하면 민주주의의 후퇴가 선명하다.
두 번째 지표인 정당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국 정당의 4류 정치는 정치 혐오를 만드는 주범이다. 지난 정권의 ‘편 가르기’는 정당의 사회 통합과 갈등 조정 기능을 급속히 무력화시켰다. 국민의 힘은 지난 대선에서 남녀 사이를 또 갈라놓았다. 사회 통합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유지될 수 없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정당의 ‘게이트 키핑’ 역할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판에도 당연히 수많은 선동가들이 등장했고 30~40%대의 지지율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기성 정당의 문을 두드렸을 때 정당 지도자들은 심사숙고했다.
인기 높은 인사를 선거에 앞세우면 집권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이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잠재적 독재자를 걸러 내는 ‘문지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이들을 차단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건실한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한국 정당들은 오로지 권력 쟁취를 위해 존재한다. 민주당이 5년 만의 정권 교체를 당한 원인으로 후보의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그놈의 인기’에 홀려서 해당 인물을 2개월 만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내보내는 이중의 패착을 두고 말았다.
유권자 일각에선 자신들이 ‘주인’인데도 거꾸로 정치인을 숭배 대상으로 모시는 팬덤 정치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국가 미래를 망치는 복지 포퓰리즘에 대해서도 점차 익숙해지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들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최근 선거 양상을 보면 쉽게 제 자리를 찾을 것 같지도 않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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