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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기존 외국환거래법을 폐기하고 23년 만에 새로운 외환법 제정에 나선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말까지 신외환법 제정의 기본골격을 세우고, 내년에는 법안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기존 외환법은 '외화 유출 억제' 기본 방향에 맞춰 신고제 중심으로 전면 개정된 후 현재까지 개편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자본거래 시 사전 신고 등을 규정한 현행법이 해외송금과 투자 등 거래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아울러 기업이나 개인에게 과도한 형벌 책임을 부과한다는 점도 고질적인 문제로 지목돼 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경제복합 위기가 거론되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논의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신외환법이 외자유출 속도를 빠르게 해 우리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외자유출금지 보수적 시각
기획재정부는 5일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서 ‘신 외환법 제정 방향 세미나’를 열고 새로운 외환법 재정을 위한 개편 방향을 논의했다.
김응철 우리은행 외환그룹 부행장은 “지난해 외환 업무로 고객이 우리은행측에 문의한 총 8만건 중 외환규정에 대한 문의가 5만여건으로 66%에 달했다”며 “주로 이주비나 재외동포 재산 반출, 유학생 송금 등에 관한 개인의 거래 상담이 25%, 해외직접투자 등 자본거래 상담이 38%의 비중을 차지했으며, 간단한 송금 관련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부는 새 외환법에서 자본거래와 지급·수령 단계에서의 사전 신고의무를 폐지한다는 입장이다. 미신고를 원칙으로 사전에 인지를 못했을 때 중대한 경제적 영향을 미치는 일부 거래에 대해서만 신고제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복잡한 법령 체계도 전면적으로 손보기로 했다. 정부는 ‘원칙’과 ‘예외’ 구조로 법령 서술체계도 단순화하기로 했다.
정부는 아울러 ‘동일 업무·동일 규제’ 원칙을 바탕으로 개별 금융기관의 외국환 업무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일반 환전이나 송금 업무를 은행이 독점해 왔는데 증권사·보험사·핀테크 등에도 허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조정하겠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복안이다.
김성욱 기재부 국제금융국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기존 법을 부분적으로 고칠 게 아니라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새 외환법 제정 필요성에 대해 “외국환거래법을 개편해 규제 완화를 해왔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외국환관리법 시절부터 ‘외환 유출 금지’ 철학이 녹아있기 때문”이라며 “기본 뼈대를 바꾸지 않고서는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방기선 기재부 1차관도 “자본거래 사전 신고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외환거래 걸림돌이 되는 규제는 과감히 정비하겠다”며 “기존 외환법을 폐지하고, 신외환법 제정으로 거래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1990년대부터 경제성장과 세계화 바람을 타고 외환거래 자유화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다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지금의 ‘외환거래법’이 제정됐다. 법률 이름이 ‘관리’에서 ‘거래’로 바뀌었고 법률의 내용도 ‘대외거래의 조정·관리’에서 ‘대외거래의 자유 보장’으로 달라졌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여전히 외자유출 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존 외환거래법에 대해 “외자의 유입과 유출을 함께 촉진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암묵적으로 외자유출 억제를 위해 거래 시 사전신고나 지급 시 절차적 규제 등 조정과 관리방식으로 운영됐다”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는 우리 사회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외자 유출’에 대한 남다른 경각심과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게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환율 변동폭 더 커질 수도
일각에선 신외환법이 제정되면 외자 유출 속도가 지금보다 빨라져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경제 복합위기가 거론되는 현 시점에서 이런 논의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최근 한·미 간 통화스와프 재체결 가능성을 논의 중이지만 현재로서는 ‘외화 안전망’이 없는 상황이다. 또한 환율 방어의 ‘총알’로 불리는 외환보유액도 줄어드는 추세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6월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382억8000만 달러로 전월말(4477억1000만 달러)보다 94억3000만 달러나 감소했다. 2008년 11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17억5000만 달러 감소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가 세계 9위로 적은 수준은 아니지만 외환위기를 예방한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경고한다.
일례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2397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환시장 변동성을 막지 못했다. 2008년 신외환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무산된 것도 금융위기와 맞물려 대규모 외화 유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해 △연간 수출액의 5% △시중 통화량의 5% △단기 외채의 30% △외국인 증권 및 기타 투자금 잔액의 15% 등을 합한 100~150%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IMF의 기준을 적용하면 지난해 한국의 외환보유액 비중은 98.94%로 적정 수준에 못 미친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단기외채규모(만기 1년 미만) △3개월치 수입액 △외국인 국내증권투자액의 3분의1을 합한 값을 적정 외환보유액 수준으로 보는데 해당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9300억 달러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외환규모는 5000억 달러 미만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올해 2월 한국경영학회에서 발표한 ‘기축통화와 적정 외환보유고’ 논문에서 “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중이 50%를 넘어야 외환위기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현 상황에서 외환시장이 개방되면 시장 변동성이 더 불안해 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무역적자는 103억 달러로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상반기 91억6000만 달러보다 큰 수준으로 나타났다. 무역적자는 그만큼 달러가 유출됐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달러 유출은 환율과 수입 물가를 상승 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전문가들을 우리 경제가 무역수지가 적자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경상수지 적자→원화 가치 하락→수입물가 상승’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현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환율로 무역수지 적자기조가 고착화될 경우 중장기적으로 대외건전성을 악화시키고 자본유출을 유발할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신외환법으로 개편된다고 해도 외환시장 관리는 존재해야 한다”며 “대규모 거래가 단기간에 일어나 외환시장이 교란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최근 원·달러 환율이 ‘금융위기의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1300원대에서 크게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외환시장을 개방하면 원화의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기에 규제 완화를 논할 분위기냐는 문제제기도 있다. 국제금융학회장을 맡고 있는 강삼모 동국대 교수는 “국내 외환시장 개장시장 연장 등으로 원화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재부는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듯 외환모니터링 등 대외건전성 조치는 기존처럼 유지하면서 시장상황과 관계없이 연말까지 의견을 수렴한 뒤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구체적인 정부 법안을 내년 이후 내놓겠다는 전략이다.
한편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5일 금융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제·금융시장 전문가 간담회에서 “현재 경제·금융시장 상황은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복합위기 국면”이라며 “금융시장 변동성 완화와 금융부문 잠재리스크 대응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김주현 위원장과 간담회를 가진 경제·금융시장 전문가들도 “내년까지 글로벌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하며 인플레이션 안정화 등 선제적인 정책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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