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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생각에 잠긴 창수의 머리 위로 살짝 이지러진 반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풀숲에 핀 노란 국화는 제가 땅위에 달이라고 뽐내고 있다.
‘허긴, 달은 향내를 풍기진 않지!’
창수가 국화에 다가갔다. 가을에 피는 소국은 창수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그 소국처럼 작고 귀여운 소녀가 떠올랐다. 이 집 주인 안진사의 딸이며 중근의 바로 아래 여동생 성희였다. 창수가 안진사의 집으로 몸을 의탁하던 봄날, 창수를 맞이한 것은 성희였다. 달빛이 밝던 밤에 창수는 무작정 안진사댁 대문을 두드렸다. 마침 달구경을 하면서 마당을 서성이던 소녀 성희가 그를 맞아 주었다.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은 모습이었다.
“누구신지요?”
열다섯의 성희는 밤에 문을 두드린 청년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저는 아랫마을의 김창수라 합니다. 안진사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아, 김석사님이시군요.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성희는 반갑게 창수를 맞아 주었다.
“아버님은 잠시 나가셨습니다. 이리로 드세요.”
창수는 성희를 따라 사랑방에 들어갔다. 널찍한 사랑방은 포근했고 작은 탁자에는 책이 놓여 있었다. 성희가 물러가고 잠시 후 붉은 머리띠에 옥색 옷을 입은 청년이 나타났다.
“저는 중근이라 합니다. 아버님께서 칭찬하시던 바로 그 김석사님이시군요.”
“해주성 전투에서 뵈었습니다. 백발백중 명사수로 소문난 바로 그 분이시군요.”
둘은 맞절을 하였다. 창수는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중근을 보았다. 나이는 창수보다 어려 보였지만 기품이 흐르는 외모였다. 이토록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이 그렇게도 총을 잘 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김석사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동학당의 아기접주로 명망이 있으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성희가 들어왔다. 간단한 술상을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호롱불 아래서 성희의 모습은 달빛을 받은 모습과 또 달랐다. 유난히 큰 눈에 길다란 속눈썹이 아른거렸다.
“아버님은 김석사처럼 훌륭한 젊은 분이 동학당 전투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몰래 밀사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뵙고 보니 역시 아버님의 판단이 옳으셨습니다.”
“제가 해월 선생께 명을 받고 산포수들을 대리고 거병하기는 하였으나 왜병들의 화력이 하도 강해서 해주성을 버려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월산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다음 일을 도모하고 있었지요.”
“그 때 아버님이 김석사께 사람을 보내셨지요, 아마?”
“예. 어르신께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시는 분이시지요. 우리 동학당이 타도하려는 양반들과는 거리가 먼 분이어서 저는 흔쾌히 어르신의 뜻에 따랐습니다. 해월 선생께서도 저의 이 결정에 동의해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 늦으셨나요? 아버님께선 김석사님을 자못 기다리셨습니다.”
“그 사이에 저를 시기하는 다른 접주가 우리 부대를 공격하여 제가 아끼는 부하가 죽었지요. 제 옷을 모두 벗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눈 속에서 통곡했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그만 홍역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런!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예!”
성희는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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