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특권층 심판 받아야”
“86운동권 정치인들은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국민과 민생은 도외시하고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86운동권 특권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입니다.”
1월31일 민주화운동동지회·바른언론시민행동·신전대협이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공동 개최한 ‘반칙과 특권의 청산을 위한 운동권 정치 세력의 역사적 평가’ 토론회에 보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서면 축사 내용이었다.
한 위원장은 축사에서 “(86 운동권 정치인들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기는커녕 4월 총선에서도 살아남아 권력을 향유하고자 혈안”이라고 주장했다. 또 “과거 운동권이었다는 것을 특권처럼 여기면서 정치 퇴행을 이끄는 세력들은 이제는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86운동권 특권 세력을 대체할 훌륭한 인물들을 내세워 그들이 국민의 봉사자로서 우리 정치의 중심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 축사를 요약하자면 사실상 더불어민주당을 장악하며 국운을 쇠하게 한 운동권 세력 대체재 발굴에 앞장설 국민의힘에 국민이 총선에서 힘을 모아달라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한동훈발(發) ‘운동권 청산’ 프레임 전쟁의 본격적인 시동이었다.
국민 52% “운동권 정치인 물러나야”
민주당에 현존하는 운동권 출신 의원 규모는 어느 정도 될까. 정치권에 의하면 올해 1월 기준으로 민주당 현역 의원 167명(송영길 전 대표 등 탈당·제명 인사 제외) 중 운동권 이력을 가진 사람은 65명(38.9%)이다. 1980년대를 전후해 학생운동에 참여한 공식 기록이 남아 있거나 의원 스스로 역대 선거 공보물에 운동권 경력을 직접 기재한 것을 토대로 추산한 것이다.
‘86세대’ 범주에 들어가는 1960년대생·1980년대 학번의 민주당 의원은 49명(29.3%)이다.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 이력이 있는 의원은 총 30명(18.0%)이다. 대표적 운동권 출신 인물은 15대 국회 때 최연소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 김민석 의원 및 송영길 전 대표와 정청래·조정식·서영교 의원 등이 있다. 1963년생인 송 전 대표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6 운동권의 맏형 격이다. 정청래·조정식·서영교 의원은 친명계 핵심이다.
민주당 지도부에 86세대가 전진 배치된 건 2016년 20대 총선 때였다.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한 2014년부터 당대표·원내대표 구성 현황을 살펴본 결과에 따르면 86세대 기준에 속하는 지도부는 2016년 5월 취임한 우상호 원내대표가 최초였다. 이후 우원식·이인영·김태년 의원 등 학생운동 출신 원내대표들이 줄줄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한 위원장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문제점으로 ‘비(非)생산성’ ‘폭력’ ‘내로남불’ 등을 꼽고 있다.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부터 이미 운동권 문제로 민주당과 각을 세워왔다.
한 위원장은 민주당 돈봉투 전당대회 의혹과 관련해 송 전 대표와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는 “어릴 때 운동권 했다는 것 하나로 사회에 생산적인 기여도 별로 없이 시민들 위해 군림하며 수십년간 대한민국 정치를 후지게 만들어왔다”고 했다. 또 “일부 운동권 정치인은 겉으로 깨끗한 척 하면서 NHK(광주 시내에 소재했던 유흥주점)에 다닌다”고 직격했다. 송 전 대표는 2000년 5·18 20주년 전야제 참석을 위해 광주에 갔다가 새천년NHK라는 유흥주점에서 술을 마셔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한 위원장은 2022년 5월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의 민형배 민주당 의원과의 설전에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던 경우에 민간인을 고문하던 사람도 있었다”며 ‘서울대 프락치 사건’도 소환했다.
한 위원장의 ‘운동권 청산’ 프레임을 두고 야당·전문가 반응은 엇갈린다. ‘운동권 대부’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과 하태경 의원 등 국민의힘의 운동권 이력 현역 의원·출마자들을 두고 한 위원장이 말하는 운동권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입장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운동권 특권세력 이렇게 묶어서 얘기할 실체가 있기는 있는 것이냐”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전문가는 도덕성 등이 정의 기준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86 세대가 민주화 운동으로 얻은 기회와 특권으로 후속 세대에게 분배돼야 할 부와 권력을 20년 이상 장기 독점하면서 이제는 불평등의 치유자가 아니라 불평등의 생산자·수혜자가 됐다”고 꼬집었다.
여론은 한 위원장의 운동권 청산 목소리에 대체로 긍정적이다. 여론조사공정㈜이 데일리안 의뢰로 지난달 5~6일 전국 성인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52.0%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37.9%, ‘잘 모르겠다’는 10.0%였다.
사당화 겨냥해 표밭 다지고 이삭 줍기
한동훈발 프레임은 운동권 청산만이 아니다. 그는 ‘이재명 사당화 논란’까지 도마에 올리는 투 트랙 전략을 펴고 있다. 한 위원장은 1월1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4선 이상 중진 의원들과 오찬간담회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를 보면 이재명 대표 관련자들이 아닌가. 거기야말로 이 대표의 사당 공천을 하기 위한 공관위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공천 내홍은 상상 이상이다. ‘친문 황태자’ 임종석 전 실장을 포함해 비명 상당수가 컷오프(공천 배제)되거나 평가에서 치명적인 감점을 받았다. 현역 의원 평가하위 20% 중 많은 수가 비명계라는 소문이 정치권엔 파다하다. 비명 현역 의원 지역구에 대한 운동권 출신 포함 친명 원외인사들의 ‘자객 출마’도 빈번하다. 친명계는 공천 학살을 부인 중이지만 비명계는 ‘이재명 사당화’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친·비명 간 갈등을 파고들어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권자들에게 심고 나아가 민주당 탈당파를 ‘이삭 줍기’한다는 게 한 위원장 전략이다.
한 위원장 전략은 실제로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여야 최대 격전지인 ‘중원’ 대전 유성을에서 내리 5선을 한 이상민 의원이 민주당 탈당 약 한 달 만인 1월8일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했다. 대전·충청은 총선에서 여야 명운을 가를 캐스팅 보터 지역이다. 국민의힘은 이 의원을 통해 중원 표밭 다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의원은 지난달 17일 단수 공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국회부의장인 4선의 김영주 의원도 민주당 탈당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4일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김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입당 환영식에서 “정치인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사리사욕을 위한 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며 이 대표를 겨냥했다. 국민의힘은 김 의원의 합류와 민주당 저격을 바탕으로 부동층 표심을 얻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운동권 청산과 이재명 사당화 논란 규탄이라는 한 위원장의 승부수가 통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선거는 개표함 열어보기 전까지는 결과를 아무도 모른다’는 말처럼 모든 건 4월10일이 지나야 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유창선 연세대 교수는 “지금 민주당의 공천이 막무가내식이기에 국민의힘 공천 문제점을 가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한 위원장이 강조하는 86세대 운동권 청산 주장은 높은 공감대를 만들어내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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